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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39.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 무지개의 위로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아르수아 Arzua ~ 오 페드로우소 O Pedrouzo(O pino)      

  내일이면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콜포스텔라에 도착이다. 사리아 이후 새로 합류하는 순례자뿐 아니라 여행객도 많아지며 거리는 북적이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까워질수록 순례길은 활기 넘치고 들떴다.

  무엇보다 식당 메뉴판이 변했다. 스페인어로만 되어있는 묵직한 메뉴판에서 음식을 고르는 일은 어려웠다. 그런데 사리아 전후로 메뉴판에는 외국인을 위한 음식 사진과 영어가 등장했다. 달걀부침, 토스트, 베이컨 등 소위 미국식이라고 하는 음식을 파는 식당도 많아졌다. 음식 가격도 전반적으로 조금 더 비싸졌다.    

 

  오늘도 느긋하게 출발했다. 성당을 지나 마을을 빠져나가야 하는 곳이 공사 중이라 순례길 표시 방향으로 갈 수 없었다. 순례길 초기에 그랬듯이 남편은 자기 생각대로 걸음을 옮겼고, 자신 있게 걸어가는 남편 뒤를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다.

  한참 걷다 보니 막다른 길이 되었다. 남편은 스페인 길이 왜 이 모양이냐며 짜증 섞인 화를 냈다. 공사하는 곳으로 되돌아왔고 찬찬히 살펴보니 임시로 만든 순례길 안내표시가 있었다. 그동안 갈림길에서 순례길 표시를 찾으며 차분했던 남편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당혹스럽고 힘이 쭉 빠졌다.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나무들이 울창한 길을 걸었다. 대기가 불안정한 지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고 햇빛이 나면서 비도 내렸다. 그때 하늘에 환상적인 무지개가 떴다. 두 번째 보는 무지개다. 무지개를 보니 울적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순례길에서 두 번째 보는 무지개는 환상적이며 아름답다. 무지개를 보면 힘이 난다.

  10km 정도 걸은 후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콘 레체를 주문하고 배낭에 가지고 있던 삶은 달걀과 같이 먹기로 했다. 남편은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소금을 커피잔 받침에 따르려다 실수로 왕창 쏟았다. 내가 만류해도 남편은 소금을 다시 통에 넣겠다며 애를 썼다.

  달걀을 먹다 보니 이번에는 소금이 모자랐다. 그냥 먹어도 되건만 남편은 기어코 소금을 더 따른다고 하다가 커피 한 잔을 그대로 쏟았다. 테이블에서 넘쳐흐르는 커피는 의자로 흐르고, 내가 갖고 있던 휴지로는 턱없이 모자라 냅킨을 가져와 겨우 닦았다. 

  처음에는 내 말을 무시하고 실수한 남편에게 화가 났다. 그런데 남편이 늙어서 저러는가 하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래 남편은 내 말을 잘 안 듣지만, 요즘은 아예 못 들었다고 우길 때가 많다. 마음이 심란하다.   

   

  순례길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은 점점 지치고 힘들어한다. 손빨래를 도맡아 하던 남편 대신 내가 하겠다고 하니, 그건 또 싫다고 해서 이틀에 한 번씩 세탁기와 건조기를 이용했다, 그래도 남편은 힘들어하고 점점 예민해진다. 

  내가 남편과 다른 의견을 말하거나, 내 말을 못 들어서 반복하며 안 들리냐면 남편은 화를 냈는데, 오늘도 비슷한 상황이 또 일어났다.

  대화 도중 남편은 갑자기 시장 가방을 내던지고는 왜 윽박지르냐는 터무니없는 말로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무엇 때문에 화를 내냐고 하니, 남편은 화를 내는 자기 행동의 정당성만 구구절절 아니 횡설수설한다. 도저히 대화가 안 돼서 그만뒀다.      


  한 달 넘게 순례길을 걸었고,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인 오늘은 무언가 감동적인 이야기를 쓸 줄 알았는데 무언지 모를 덫에 빠진 느낌이다. 

  30년을 넘게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30년은 같이 살아가야 할 우리 부부는 은퇴 후 삶이라는 새로운 인생의 장을 맞이했다. 그 출발점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와 이어서 하기로 한 여행이었다.

  나는 남편 제안에 별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순례길을 시작해 초반에는 힘들었지만, 적응한 후로는 점점 편안해졌다. 또 무언가를 해야 하는 책임감과 의무감 없어 긴장감과 압박감이 사라지며 편하고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남편은 아니었다. 순례길을 제안하고 전적으로 준비하고 주도했지만 걷는 동안 무릎도 아프고 단순한 하루하루에 오히려 지친 것 같다. 매일 숙소 예약하고 배낭 택배 보내고 확인하며 신경 쓰는 일이 힘들었는지도. 물어봐도 자신에 대해서 세세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편의 솔직한 심정은 모르겠다.      


  큰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지나 오늘의 목적지 오 페드로우소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순례자가 예약을 많이 했는지 속속 도착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레 힘도 생기고 목소리도 높아졌다. 저녁에 밥을 함께 해 먹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우리는 해왔던 대로 점심 겸 저녁을 먹겠다며 사양했다.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마지막 날인 오늘도 조용히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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