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솜 Jul 14. 2023

그래, 너는 말이야,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이었어

바쁜 세상 속 빠르게 멸망해 버린 나의 첫 번째 망한 소개팅!

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다들 회춘하셨나요? 저도 한국에서 스물아홉이었지만 이제 스물일곱이 되었네요. 얏호!

회춘한 기념으로 글을 써봅니다. 제 왼쪽 팔목에는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라는 말이 라틴어로 적혀있어요. 작은 레터링인데, 제 인생의 모토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을 좋아하는 이유가요, 모든 적정한 때가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딱히 안될 일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요.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가도 여유가 될 때 문득 다시 생각났어요. 그래 다시 글을 써보자. 지금은 글을 써볼 때가 아닌가 하고요. 전 가볍고 쉽게 사는 걸 좋아해요. 그렇다고 전형적인 예술가적 감성을 가진 멋쟁이는 아니에요. 지하철에서 마주하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아요.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고 평생을 살아가는 게 소정의 꿈이었어요. 자의든 타의든. 대중 앞에 개인이 선다는 게 한편으로는 참 무서운 거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람들은 쉽게 변하고, 나를 보며 웃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 화를 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글은 또 다른 느낌이에요. 글 뒤에서 서는 나는 또 다른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서 든든해요.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나요?


엄청나게 주체적이고 화려한 삶을 살고 있진 않습니다. 그래도 들여다보면 재미있고 나름 유쾌하고 또 우울하고 그러다가 괜찮아지고 그렇게 살고 있어요.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여러분들과 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공간에 내가 가장 편히 풀 수 있는 이야기가 뭘까? 오랜만에 제 이야기의 화두는 '연애'? 혹은 '소개팅'이겠네요.


올해가 벌써 절반이 갔고요, 스물 일곱 인생 첫 소개팅은 아마 겨울이었을 거예요. 친구의 친구 소개로 받은 첫 소개팅이었고요. 제 인생 처음이었고, 나름 설렜습니다. 제가 그가 맘에 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사진을 공유하지 않아서입니다. 제 셀카를 보내거나 상대의 셀카를 주고받는 게 낯간지러워요. 내가 뭐라고 상대의 사진 한 장으로 판단하고 제단하고 까는 모양새도 웃기고요. 그렇다고 외적으로 너무 아닌데 그 사진 한 장으로 깐다는 말을 하기도 뭐 하고요. 요즘은 쿨한 사람들 참 많아진 것 같은데, 보기보다 잔정이 많은 타입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관계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이에요. 그래서 되려 소개팅을 하기 전에 사진을 서로 공유하지 않는 게 좋았습니다. 한편으론 예의가 있다고 생각도 했고요. 동갑이었고요. 장소는 홍대였어요. 한중일양식으로 나열한 식당들 속에서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하시고 식당 예약도 해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깔끔하고 고마웠어요. 사진을 보지를 못했으니 솔직히 뒷모습 형체만 대충 알고 가보았습니다. 이젠 계절의 흐름에 맞춰 흐릿한 그와의 기억을 다시 나열하고 있는 제 모습이 웃기기도 하네요.


추웠고요. 치마를 입으라는 친구 말을 무시하고 바지를 입었습니다. 스키니진을 집어 입고 꾸민 듯 안 꾸민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그분 직업은 브랜드 디자이너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 한창 에어랩을 사서 열심히 꾸미고 나갔어요. 집이 멀어서 화장은 좀 떴을 거예요. 어쩔 수 없죠. 경기도 사람은 서울 나가는데만 한 시간 반입니다. 아, 날씨가 너무 추워서 롱패딩을 입긴 했어요. 식당에 이미 도착해 있다고 해서 부리나케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처음으로 해보는 소개팅이어서 정신이 조금 없었던 거 같아요. 아무래도 동갑이기도 했고, 편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주절주절 거리며 털털하게 나갔습니다. 너무 환상에 젖어있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그 누구를 만나 소개팅을 하던 '예비 남자 친구' 보다는 사람대 사람으로 상대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로가 처음엔 별로여도 점점 알아가게 되고 예상치 못한 부분을 알게 된다거나, 매력을 느낀다거나, 자주 만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자연스레 호감이 생길 수 있을 거라는 촉촉한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의 첫 번째 소개팅남에게도 그런 약간의 관대한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 이렇게 갖고 있었어요. 솔직히 딱, 처음 봤을 때 호감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계속 알아보면 호감이 안 생길 건 또 뭔가 이런 맘이었어요. 주문을 부랴부랴 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냥 서로 알쏭달쏭 했던 것 같아요. 제가 각자 친구의 소개로 나왔으니 매너 있게 대화하고 가자고 했던 것 같은데, 아마 거기서부터 꼬였을까요? 아니면 제 외적인 모습에 딱, 꽂히진 않으신 걸까요?


제일 큰 문제는, 홍대 근처가 직장이라고 했던 그분은 저 멀리 강북에 살고 계셨습니다. 저는 광교 쪽, 서울도 그나마 강남이 가까운 슬픈 경기디언이었지요. 홍대도 사실 멀지만, 그분의 거주지는 더더더 멀었어요. 만약 사귀더라도 사귀자마자 랜선연애를 시작할 판이었어요. 평일이 좀 더 프리하고 주말에 일을 하는 자영업자인 저와는 반대로, 평일은 절대! 못 만나고 주말만 데이트가 가능하셨던 그 분. 일단 저희는 관계가 시작되더라도 데이트가 거의 불가능했어요. 서울에 거주하시다 보니, 운전도 딱히 하실 필요가 없으셨고, 그분은 뚜벅뚜벅 뚜벅이. 저는 자차가 있지만, 무서운 주차난에 클락션이 남발하는 서울운전이 불가능한 지방 운전 한정 드라이버였어요. 사람의 인연이 안되려면 어떻게 해도 안된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하나도 맞는 게 없어서 신기했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남에 있어서는 개그 코드가 맞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유머라고 이야기했는데 상대가 진지하게 받아치면 곤란해지죠. 저희도 그랬어요. 이야기 중에 제가 그분에게 동갑, 연상, 연하 중 어떤 관계를 제일 선호하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분은 사람에 따라 큰 상관이 없을 것 같다고 그랬고, 저에게 다시 되물었어요. 저는 사실 전에 만난 친구가 동갑이어서, 연상을 만나보고 싶기도 했었어요. 그래서 동갑인 상대에게 동갑만 빼고 다 괜찮을 거 같다고 했어요. 나름 재밌으라고, 웃으라고 한 이야기인데 그분 표정이 썩었던 거 같아요. 그분도 자기 일상 이야기도 두런두런 많이 해주셨는데, 참 바빠 보이셨어요. 저도 물어보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연애할 시간은 있으시겠어요?' 라구요.


처음 본 사람과는 밥을 잘 먹지 못합니다. 파스타를 거의 남기긴 했지만,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1차를 마무리하였어요. 여러분은 이 이야기 혹시 아시나요? 관심이 있으면 2차를 술집으로, 별로면 2차를 카페로 간다는 이야기요. 물론 이게 정답은 아니겠지만, 저는 한국의 소개팅에 이 암묵적인 룰을 모르고 나갔습니다. 식당 앞 쪽에 있는 카페에 가자고 했어요. 1차를 얻어먹어서 2차는 제가 사는 게 당연한데, 커피는 아무래도 파스타보다는 저렴하니 이것저것 고르라고 말씀드렸어요. 배가 불러서 결국 둘 다 아메리카노를 시키긴 했지만요. 지금 생각해 보니, 디저트 고르시라고, 음료 비싼 거 드시라고 계속 말씀드린 거도, 상대방 입장에선 빚지기 싫어하는 소개팅녀의 발악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카페에 가서는 상대방분이 계속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아요. 피피티 발표하는 것 마냥 자기 인생의 목표, 플랜, 꿈이나 이런 장대한 이야기들을 계속하셨어요. 저는 계속 알쏭달쏭 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얼굴을 본 지 한두 시간밖에 안 된 사람한테 호감을 느끼는 것도 쉽지 않지만, 또 그 시간 안에 상대에 대한 매력을 못 찾을 수도 있잖아요. 사람의 매력은 무한하고, 그 매력은 은은하게 퍼져 나올 수 도 있지 않나요? 말을 계속 잘하시길래 그래도 이 소개팅.. 건강하게 잘 되고 있는 건가 했습니다. 제 맘은 사실 신경 못썼고, 상대가 나를 맘에 들어하는지 궁금하긴 했습니다. 당연히 맘에 들어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고요. 자리에서 슬슬 일어나는데, 카페 앞에서 인사하고 바로 가시더라고요. 어떻게 가실 거냐고 해서 저는 지하철 타고 간다고 하니까 본인은 버스 타고 갈 거라고 조심히 가시라고 그러고는. 회사에서 받은 설날 명절 세트 같은 거 들고 다니셨는데. 참치캔이나 샴푸 세트 같은 거요. 그거 들고 바람막이 지퍼 채우시고 유유히 떠나셨습니다. 주선자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망한 건지 안 망한 건지 모르겠다 하고 집에 갔습니다.


애프터는 고사하고 문자도 안 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게 소개팅 망한 거구나 했어요. 웃기고 슬프다가 나중에는 기분이 안 좋아졌어요. 당연히 희박한 확률이죠. 길 가던 사람 붙잡고 앉혀놓은 거 마냥 하는 게 소개팅이지만, 잘 들어갔냐, 잘 들어가시고 행복하시라, 건강하시라, 아니면 뭐 서로 안 맞는 거 같으니 좋은 인연 찾으시라 이렇게 해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동갑이면 사실 친구로 만나면 친구인데, 네가 편한 술자리에서 나를 만났어도 이렇게 할 수 있냐. 그렇게 거창하게 자기 인생 플랜과 계획을 나열했고 이야기를 나눈 정이 있는데, 손가락 부러진 것도 아니고 안부 문자 하나 안 보낼 수가 있나 하고요. 치사하더라고요. 딱 그 한마디, 치사하다 너! 이 맘뿐이었어요.


전쟁통에도 사랑을 했다고 하지만, 요즘 세상에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계산 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긴 할까요? 별의별 생각이 다 들고, 은연중에 연락을 기다렸어요. 제가 먼저 보낼 생각은 못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행복하시라고 먼저 보낼 걸 그랬내요. 좋은 경험을 했어요 하고요. 건강하시라고요.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 같던 그와의 짧은 만남은 저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었어요. 헛소리를 하지 말자. 내숭을 좀 떨어보자. 입을 닫고, 듣자. 신중히 말하자. 개그코드가 안 맞을 수도 있어. 소개팅남은 내 친구가 아니다. 설령 그가 동갑이라도. 아니다 결국 소개팅은 솔직히 남자 입장에서 여자가 자기 스타일이여야지만 쉽게 풀리는 게임이다. 나중에 주선자한테 들은 이야기는 재밌고 귀엽고 뭐 착했는데 자기 스타일 아니었다고 그러신 거 같아요. 그런데 그분이 상대방 (저)도 어차피 자기 맘에 안 들어하는 거 같아서 다행이라고 하셨다네요. 그리고 자기는 자만추 할 거라고 소개팅 안 하겠다고 하셨데요.


사귀다 차인 거도 아닌데 애프터는 고사하고 문자도 안보내줘서 황망했어요. 사귀는 게 아니더라고 인간에게 차인 느낌이었어요. 웃기지만 나름 슬픔에 차서 몇 달을 보내고 저에겐 실낱같은 다음 소개팅이 들어옵니다. 카라멜 마끼아토처럼 달아서 뱉었던 그분과의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쓸게요.


추신. 안녕을 빕니다. 홍대에서 마셨던 에스프레소 한 잔. 자네. 건승하시게나! 나 진짜 이 글을 너에게 보내고 싶은데 번호도 지웠다. 행복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