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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솜 Jul 25. 2023

고마워, 오빠랑 헤어지고 부쩍 살이 붙었어.

가끔 우린 상한 음식도 먹지. 너가 그랬어 (2부)

점과 점이 만나 선을 만들고 그 선이 모여서 빼곡하고 단단한 나 자신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짧고 굵은 그 숱한 만남에 있어 나를 스친 모든 분들이 무언가의 빵조각을 흘리고 갔겠죠. 대단한 교훈까지는 아니어도, 그 감정은 이를테면 즐거움, 편안함, 슬픔, 고마움, 사랑받는 느낌, 신경쓰임, 분노, 쓸데없는 감정소모.. 등등 기발하고 다양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 경험과 기억들이 한 뼘씩 한 뼘씩 저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킨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 있어 저를 지나간 모든 남성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표합니다. 고마워!


삶이라는 보이지 않는 수평선 위. 수많은 만남은 방점으로 찍혀있고, 그 끝에 이별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들의 모든 만남은 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옆자리에 서있는 이들을 소중히 대해야 해요. 물론 자주 잊어버리긴 하죠. 어쨌든 모든 순간들의 끝엔 유통기한이 있잖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경삼림'에서 금성무는 파인애플 통조림에도 유통기한이 있음에 절망하죠. 슬프고 웃기지만 한편으론 이별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줘요. 뭐든 유통기한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기 마련이죠. 우리를 지나치는 연애의 감정들도, 헤어진 직후는 힘들고 아프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편하죠. 이 사람은 나와 이 정도의 유통기한을 갖고 지나간 사람이다. 더 만나다간 나까지 상한다. 곰팡이는 쉽게 번지고, 나를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너와 나, 안전히 헤어졌으면 된 거다.


상한 딸기 요거트 같던 전남자친구와의 만남은 시속 60km로 뺑뺑 도는 회전목마를 타고 사랑을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쩌면 분명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그래도 끌린다? 이런 느낌. 독이 든 꽃잎을 베어 물고 천천히 죽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분명 좋아했기 때문에, 어느샌가 이 사람이랑 이렇게 만나다 결혼하는 건가 하는 마음도 생겼고요. 근데 그 짧은 연애기간 동안 설렘을 초월한 의구심은 점점 배려가 없는 만남을 체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엔 배려가 디폴트로 깔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그게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이 아닐까요? 저희는 만나면 좋았는데 집에 돌아가 전화 통화를 하다가 자주 싸웠어요. 특히나 제가 살아온 인생을 이해해 준다거나 존중해 준다는 느낌이 없었어요.


싸우고 화해하고 얼굴 보면 좋다가 집 가서 통화하고 티격거리고 싸우고. 무한반복의 굴레에 들어가고, 내 한마디 한마디에 삐지고 예민한 남자친구와 사귀어 보니 신경쇠약에 걸릴 것만 같았어요. 음식을 먹는 즐거움으로 살던 나였는데, 정말 밥맛이 없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다이어트에 최고봉은 마음고생이라고.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 혹시 만나보셨나요? 정말 우리는 서로 대화가 안 통하는 연인이었던 것 같아요. 무언가 나의 말에 꽃히면, 그가 삐지고, 왜 삐지는지 저는 이해가 안 되고, 그는 화를 내다가 너도 뭐라고 말을 해보라고 하고. 그러면 나의 입장을 말해보고, 그러면 그는 또 화를 내고. 그럼 다시 나는 입을 닫고 할 말을 잃게 되고. 나름 논리적으로 설명했는데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를 이해시키려 싸우지 않아요. 전의를 상실하고 입을 닫는 타입입니다. 어차피 그는 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퇴근 후 데이트하기도 아까운 시간에 그와 싸우고 설득시킬 힘이 없었어요.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렇게 그가 내게 세 번째의 이별을 고하던 날. 상대는 저에게 5년 후에 무엇을 하고 있을 거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당장 내일의 일도 모르는데, 딱히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고 사는 타입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업을 계속할 수도, 대학원을 갈 수도, 혹은 회사에 들어갈 수도, 결혼을 했을 수도, 사실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뿌연 미래에 자기가 있을 자리는 없는 것 같다고, 헤어지자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2,3년 후에 자기가 30대 중반인데, 만약 그때 가서 내가 자기를 차면 어떡하냐고. 너는 결혼할 생각도 없고,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날 생각도 없는 것 같다며 말이에요. 그렇게 통화가 끊겼는데요, 정말 너무 힘들어서 못 만나겠더라고요. 분명 연상을 만나고 있는데, 항상 달래주고, 안아주고, 위로해 주고, 그렇게 계속 살 자신은 없었습니다. 데이트를 하지 못할 때 혼자 있어서 외롭다고 동기들이랑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닌, 되려 나를 걱정하고 멀리서도 나를 챙겨줄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사람을 만나고 싶더라고요.


오히려 차여보니 무언가 족쇄가 끊긴 느낌도 들었어요.마음은 아프지만 나름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마음이 약해질까 봐 아이패드에 오빠가 내게 잘못한 점을 적어보니 빼곡한 문장으로 대략 19개 정도 나오더군요. 그렇게 저를 차버린 후 그는 우리의 연애기간 보다도 더 긴 시간을 저에게 매달렸습니다. 처음에는 그 연락 조차 너무 버겁고 힘들었어요. 제 마음이 흔들릴까 무서워서요. 여기저기 다 차단해도, 신기한 구멍으로 연락이 오더라구요. 몇 달이 지나도 오던 연락에 나중엔 화도 안 나고 웃겼습니다. 그와의 이별로 저는 건강을 되찾았어요. 마음이 편한지, 입맛이 돌아서 요즘을 살이 조금씩 찌네요.


마지막 통화는, 제 카카오톡 프로필을 계속 훔쳐본다면서, 프로필 뮤직이 좋았다고 그러셨어요. 그리고는 Jack Scott에 Overthinking이라는 곡을 한 번만 들어달라고 너 같은 사람은 또 못 만날 것 같다고. 너무 좋아해서 미숙해서 그랬다고, 미안했고 정말 사랑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와의 이별 후 그 짧은 사이에 다른 여자분도 잠깐 만나고 헤어졌다고 건너건너 들었는데요? 그 통화를 끝으로 저도 바로 프로필 뮤직, 바꿨습니다.


'브로콜리 너마저 - 앵콜요청금지'


고등학교 때 버스에서 이 가수는 어떻게 앵콜요청을 금지시킬 생각을 했지 하며 신기해했는데, 이제야 절실히 느끼네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다는 걸 말이에요. 나 그대를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그 힘든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그래도 그때의 나는 그때의 너를 좋아했어요. 안녕!


추신.

저도 즐겁고 마냥 행복해서 잘 맞는 연애 해보았는데요. 한때 곰신카페 회원이었습니다. 지금은 탈퇴했지만요. 그 이야기는 다음장에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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