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가방과 하얀 가방

공포 경험 에세이

by 너란아이

빨간 가방과 하얀 가방

나와 소율이는 친구였다. 90년대, 부천 소사동 깊은 고지 끝. 아스팔트가 다 깔리지 않은 골목길, 옆집 아이들의 이름을 다 알고, 초인종 대신 유리 대문을 두드리면 대답이 돌아오던 시절. 우리 둘은 서로의 하루를 거의 전부 공유했다.


같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늘 이야기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바로 앞집에 살았지만, 우리 아빠도 소율이네 아빠도 무서운 편이라 밤늦게까지 노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소율이네는 아빠는 석유집을 하셨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부자였다. 난 소율이네 집에 가서 과일에 케이크를 먹으며 공부하는 게 제일 좋았다. 소율이네는 커다란 드럼통들이 늘 마당에 줄지어 서 있었고, 기름 냄새가 스멀스멀 풍겼다. 그 냄새마저도 우리에게는 어떤 안정감 같은 게 있었다.

매일 아침 7시. “소율아, 학교 가자!” 내 목소리가 골목길을 울리면 우리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소율이는 하얀색 책가방, 나는 빨간색 책가방을 들고 학교까지 걸어갔다. 길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얘기를 그리도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학교 앞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고, “하굣길에 만나자!” 하고 손을 흔들며 각자 반으로 들어갔다.


그날 오후, 나는 집으로 돌아와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리 집은 직사각형을 두 개 겹친 듯한 주택으로 앞집과 뒷집이 나뉘어 있었다. 2층 오른쪽 창문을 열면 옆집이 바로 보였고, 그곳은 미라네였다. 미라네 할아버지는 얼마 전 돌아가셨고, 할머니와 미라만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손이 커서 반찬을 늘 많이 하셨고, 가끔 그 창문으로 반찬을 건네주기도 하셨다. 콩자반을 주실 때도 있었고, 채소 농장에서 따 온 상추를 주실 때도 있었다.


솔직히 귀찮았지만, 안 받으면 버릇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억지로 받았다. 반찬을 부엌에 내려놓고 숙제를 했다. 저녁을 먹고 일기를 쓰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때 종이 인형 오리기에 푹 빠져 있었다. 엄마가 불을 끄라 하면 후레시를 켜고 몰래 오리고, 다 오린 인형들을 책 속에 끼워 넣었다. 손가락 끝이 얼얼해질 때까지 가위질을 하다 잠이 들었다.


깊은 밤이었다.


“덜커덕.”
어디선가 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여동생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동생 방으로 뛰어갔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이상했다. 여동생은 자기 전에 창문은 늘 잠가 둔다. 열려있는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로 갔다. 닫으려 했지만 안쪽 창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주어 닫으려는데, 끽소리가 나면서 조금씩 움직였다. 그때 옆집 불이 켜졌다.


여동생 방 창문 너머로 미라네 부엌이 보였다. 평소라면 밤에는 불이 꺼져 있어야 하는데,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부엌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때 보였다. 하얗고 빨간빛이 바닥에 내려앉으며 미라에 부엌 앞에 있던 슬리퍼를 비추었다. 그 불빛이 꼭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문을 닫으려 필사적으로 낑낑댔다. 너무 무서워 여동생을 불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강한 빛이 창가를 비추었다. 슬리퍼 위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한 남자가 떠 있었다. 발은 땅에 닿지 않았고, 그림자조차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엄마와 아빠는 내 소리가 안 들리는지 남동생과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재빨리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 온몸이 떨려서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때, TV 뒤에서 이상한 불빛이 스며들었다. 바로 그 하얀빛과 빨간빛이었다. 귀가 먹먹 해지며 낮은 소리가 웅웅 울렸다.


하지만 놓친 게 있었다. "바로 여동생"

여동생 방 창문을 닫지 못했다는 생각에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불을 켜지 못했다. 불을 켜면 뭔가 더 선명해질 것 같아 무서웠다. 2층에 오르자 조금 전보다 더 선명하게, 창문을 비추는 불빛이 있었다. 여동생을 흔들어 깨웠지만,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미라네 부엌문이 다시 열리고, 그 남자가 문지방 사이에 떠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발목이 보였다. 발이 아주 큰 사람이었다. 당장이라도 내게 얼굴을 들이밀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무서움에 눈물이 났다. 그런데 또 궁금했다. 창문을 반쯤 닫고 창문에 그려진 무늬사이로 미라네 부엌을 쳐다보았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아래층에서 엄마가 나를 불렀다.

“유라야, 학교 안 가?”


나는 정신없이 1층으로 내려갔다. 아침이었다. 소율이가 대문 앞에서 하얀 가방을 메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동생에게 물었다.

“야, 너 어제 창문 열고 잤어?”
“무슨 소리야. 그 창문 고장 나서 안 열리잖아.”
“내가 너 불렀잖아. 너 왜 안 일어났어?”
“언니, 어제 내 방에 왔었어?”


엄마에게도 물었다.
“엄마 어제 내가 소리 지른 거 들었어? 내가 엄마 방에 간 거 기억나?”
“무슨 소리니? 너 네 방에서 잤잖아.”


나는 아무도 깨지 않았던 그 밤을 떠올렸다. 하얗고 빨간빛,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떠 있던 어떤 남자의 큰 발.


책가방을 챙기며 현관문을 열었다. 소율이의 하얀 가방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 순간, 내 빨간 가방과 나란히 놓인 그 하얀 가방이 내 심장을 마구 요동치게 했다.


정말 난 귀신을 본 걸까? 지금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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