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자신의 감정과 아이의 감정을 조율하라
감정코칭의 기본 원리는 “아이의 감정은 수용해 주되 아이의 행동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정하라”이다. 이게 말은 쉬운데 실제로 해보면 결코 쉽지가 않다. 아이의 감정을 수용하라는 측면이 강조되면 너무 오냐오냐 하는 방임이 되고 아이의 행동을 수정하라는 측면이 강조되면 억압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 집착은 억압이 아닌 줄 알았다. 억압은 무섭게 하는 게 억압이고 부드럽게 하면 억압이 아닌 줄 알았다. '나는 감정코칭으로 부드럽게 말했는데 왜 아이는 내 말대로 행동을 안 하지? 분명히 아이와 정서적 연결을 하고 난 후 좋게 말을 했는데 그러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하지 않나?' 하면서 답답하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드럽게 말을 해도 내가 끝까지 내 입장을 고수하면서 아이한테 내 말대로 따라주기를 은연중에 강요한다면 아이의 입장에서는 매우 큰 억압이 된다는 사실을 어렵게 깨달았다. 난 화내지 않았으니까, 목소리가 부드러웠으니까, 억지로 시키지 않았으니까 억압을 안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 불평했고 저항했다. 난 더 이상 부드럽게 해 줄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지금 돌아보니 내가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아이를 내 뜻대로 바꿔 놓아야만 한다는 나의 목표를 절대로 내려놓지는 않으면서 말을 했었던 것 같다. 내 나름대로는 여러 방법을 다양하게 제시해주기도 하고 아이가 하는 말을 경청해주기도 하고 아이 감정을 표현하도록 돕기도 했지만 결국은 내 말이 맞고 내 말대로 해야 너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나의 입장을 결코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 입장에서 엄마는 착하긴 한데 참 집착이 심하고 내 마음 몰라주는 답답한 엄마였던 것이다. 내가 아이에 대해서 '어쩜 이렇게 내 말을 못 알아듣지?'하고 답답해했던 만큼 아이도 자기 딴에는 '엄마는 어쩜 이렇게 내 말을 못 알아듣지?'라며 답답해하고 있었던 거다.
아이가 내 말을 따라주지 않으면 엄마는 마치 인생길에 커다란 벽을 만난 것처럼 답답하고 괴롭다. 내 아이가 소중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엄마는 물러설 수가 없다. 엄마가 엄마 뜻을 끝까지 고집하면 착하게 자기가 물러서주는 아이도 있지만 끝까지 자기 고집을 부리면서 물러서지 않고 버티거나 폭발하는 아이가 더 많은 것 같다. 고집이 세고 집착이 큰 엄마의 자식일수록 아마 엄마를 닮아서 그 아이도 웬만해서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엄마처럼 고집 세게 자기 입장을 고수할 가능성이 더 높다.
아이가 고집을 부리면서 엄마한테 맞설 때 아이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격하게 표현하기 쉽다.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서 울고 짜증 내고 화를 내면 엄마는 이번에는 마치 낭떠러지가 깊은 협곡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감정코칭은 이 위험한 협곡에서 발 하나도 다 들어가지 않을 만큼 얇게 난 길을 자전거를 타고 건너는 것처럼 위태로운 일이 된다. 이쪽 절벽으로 넘어지면 방임으로, 반대쪽 절벽으로 넘어지면 억압으로 빠지는 것이다.
좋은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이 가느다란 길을 자전거를 타고도 무서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길을 잘 건너가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화는 내지 않았지만 계속 핸들을 한쪽 방향으로만 꺾는다면 결국에는 집착이라는 억압의 길로 빠지고 만다.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을 돌보지 않고 억지로 참거나 아이 마음으로부터 도망가서 애써 외면하고 보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면 이번에는 방임이라는 길로 빠지게 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수많은 감정적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어떨 때는 막막한 벽을 만나서 더 이상 진전을 할 수 없는 갑갑한 순간도 만나게 되고 또 어떨 때는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협곡에서 외줄처럼 가늘고 긴 길을 위험천만하게 건너가야 하는 순간도 만나게 된다. 엄마가 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알았으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넘치는 사랑은 집착이 되고 모자라는 사랑은 방임이 된다. 감정코칭은 이 넘치는 사랑과 모자라는 사랑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지혜이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적절한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렵기만 하다. 대개 우리는 어릴 때 내가 경험했던 사랑을 바탕으로 적절한 정도를 가늠하게 되는 것 같다. 어릴 때 모자라는 사랑을 받은 사람은 똑같이 아이에게 모자라는 사랑을 주면서 자신의 사랑이 모자라다는 것을 모를 수 있다. 아이가 외롭고 공허한 상태인데 잘 모르고 물어봐 주지 않는 것이다. 관심과 따뜻한 눈빛이 필요한 순간에 엄마가 바쁘거나 자기 생각에 빠져 아이를 미처 보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이 모자라는 사랑을 받았기에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아이에게 너무 넘치는 사랑을 주면서 이건 넘치는 게 아니라고 믿을 수도 있다. 아이가 힘들다고 하는데도 이게 사랑이라며 과도한 학습과 교육에 몰두하기도 하고 아이가 자유롭고 싶은데 엄마가 아이를 풀어놓지 못하고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면서 언제나 내 눈앞에만 두려고 하는 과보호를 하기도 한다.
어릴 때 넘치는 사랑을 받은 엄마도 똑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내가 넘치는 사랑을 받았기에 이것이 과보호이고 집착인지 모르고 아이에게 내가 받은 대로의 사랑을 과한 줄 모르고 준다. 아니면 반대로 내가 넘치는 사랑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상처가 돼서 오히려 아이에게 약간 모자라는 사랑을 주면서 이게 적당한 사랑이라고, 나는 과보호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쿨한 엄마라고 믿는다.
아이에게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적절한 사랑을 준다는 게 생각보다 정말 어렵고 복잡한 일인 것 같다. 아이의 감정은 온전히 수용해 주면서 행동은 더 바람직한 방향이 있다고 부드럽고 단호하게 알려주기 위해서 엄마는 순간순간 달라지는 자신의 감정을 잘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순간순간 달라지는 아이의 감정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자신이 받았던 사랑의 기억에 사로잡히지 말고 예전에 자신이 받았던 사랑에 기초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과 아이가 느끼는 감정에 초점을 맞춘 사랑을 줘야 적절한 사랑이 될 것 같다.
아무튼 말은 쉽지만 참 어려운 게 자식 키우는 일이다. 다른 엄마들은 어떻게 이 어려운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 해낸 건지 놀라울 정도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도 최선을 다 했으니 아이는 어쨌든 하루치만큼 잘 컸겠지 하고 믿어본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나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성장한 엄마가 되어 있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