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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Apr 23. 2024

눈물의 여왕,

드라마를 볼 수 있는 틈이 생긴 일상, 만세 만세 만만세.

눈물의 여왕을 열심히 보고 있다.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고 서른이 넘어가며 대중문화와 급격히 멀어진 삶, 아이를 낳고 코로나를 겪으면서는 문화, 여가가 전무한 삶을 살았기에 박지은 작가의 전작들은 심지어 별그대 까지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김수현을 드라마로 만난 건 해를 품은 달 이후로 처음이니, 나도 어지간히 시대에 뒤떨어지며 살았구나 싶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인기 있는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보기 시작하였는데, K 드라마의 수준이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좋아졌음을 느끼는 중이다. 대사, 연출, 연기, 흥행 뭐 하나 빠지는 것 하나 없다.


눈물의 여왕은 나의 여러 알고리즘에서 김수현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너무 보여주는 바람에 홀리듯이 들어가서 보게 된 경우이다. 해를 품은 달의 이훤 이후로 처음 만나는 그, (이런 말이 좀 그렇긴 하지만) 나도, 한가인도 아이 둘의 엄마가 되었는데 그는 그때가 엊그제라 해도 믿을 만큼 변한 게 없다. 눈물의 여왕의 대사 그대로 취하면 귀엽고, 울면 안아주고 싶은 모습의 그, 연기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이래서 김수현, 김수현 하는구나를 십여 년 만에 새삼 느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는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드라마를 보게 된다. 많은 남주들의 매력이 결혼하면 피곤해질 남편상으로 훤히 그려지는 건 굉장히 슬픈 일이다. 연애 감정이나 밀당의 설렘을 넘어선 저 너머가 보인다고 해야 하나,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보자면 나는 대문자 T일지도 모르겠다.


눈물의 여왕에서 홍해인이 기억을 잃을지도 모르는 뇌수술, 그러나 안 하면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뇌수술을 받네 마네 하는 것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포스팅을 본 적이 있다. 당연히 수술을 해야지 왜 고민하냐는 T들의 의견과 기억이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가냐며 해인이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한다는 F 들의 의견이었다. 여주인공의 뇌수술을 가지고도 MBTI로 이야기하다니, 혈액형을 두고 B형 남자 어쩌고 하던 나의 이십 대를 생각하니 그건 마치 고릿적 시절처럼 느껴진다.


그 뇌수술에 대하여 나에게 묻는다면 첫째 대답은, 아이고 애가 없어서 그래도 다행이다, 이고 둘째는 재벌이라 돈 걱정이 없어서 다행이다.이며, 셋째 대답은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그냥 기억의 상실인 건지 인지 능력의 상실인건지에 따라 최종 수술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인지 능력의 상실이라서 나의 지능이 어린아이 수준으로 퇴화되고, 계속 밥 달라고 조르고, 매일매일 딴 소리를 하며 길거리를 배회하게 된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 훌륭한 의료진과 간병인을 붙일 수 있다 해도 나는 지금의 나로 죽고 싶다. 하지만 기억의 상실이라면, 차곡차곡 넣어온 유리병의 사탕이 쏟아지듯 기억만 사라지는 것이라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의무 차원에서라도 의당 수술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백현우의 절절한 마음처럼 처음부터 다시 채워 넣으면 되는 유리병 사탕이니까. 살아주면 되는데 그것조차 싫다 하고 떠난다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결정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눈물의 여왕을 보며 산뜻했던 것은 재벌가의 제사준비를 그 집에 장가온 남자들이 하는 장면이었다. 원래 제사준비는 남자들이 하는 거라고 사위들이 모여서 투덜대며 전을 부치고, 자기 아들 손에는 물 한 방울 못 묻히게 한다는 설정, 현실을 유쾌하게 비꼰 장면에서 작가의 내공과 재치가 느껴졌다. 거기에 주연들의 로맨스뿐 아니라 조연들의 서사까지 더해지니 꼭 주인공이 아니어도 내 이야기를 가질 수 있다는, 비주류의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힘을 주는 것 같아 따스함도 느껴진다.



종영까지 단 두 회 만을 남겨두고 있는데, 산뜻하던 드라마가 어째 전형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다. 이렇게 능력 있는 악역이라니, 말도 안 되는 누명에 감옥이라니, 물론 드라마는 해피엔딩을 맞을 것을 의심하진 않는다. 다만 다소 산으로 가고 진부한 신파의 고구마를 먹은 남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까,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어떨 땐 넷플릭스로 영어자막을 켠 상태로 드라마를 보기도 하는데 영어 번역도 괜찮고 흥미로워서 보는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내 팔자를 내가 꽜냐고"라는 찰진 대사가 I ruined my own life.로 번역이 것이 재미있었다.  나는 필요하다면 I ruined my own life. 란 말을 뱉어 낼 수 있게 되었는데 반대로 이 드라마를 시청한 외국인이 내 팔자를 내가 꽜어요라고 말을 하는 상상을 하니 웃음이 픽 나온다.


K 드라마, 전 세계적으로 쭉쭉 뻗기를 시청자로서, 한국인으로서 열심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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