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고향이신 아빠덕에 어릴 때부터 빨간 뭇국과 빨간 무나물을 자주 먹고 자랐다. 대파와 무가 잔뜩 들어가서 칼칼하면서 달큰한 소고기 뭇국과 새우젓과 돼지고기, 고춧가루로 맛을 낸 무나물은 다른 반찬 없어도 밥 한 공기 뚝딱 할 수 있는 우리 엄마표, 아빠를 위한 반찬이었다. 우리 집에서 늘 그렇게 먹으니 다른 집에서도 다 그렇게 먹는 줄 알았지 그게 경상도식인지는 전혀 모르고 자랐다.
아빠는 돌아가시고, 친정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을 일도 점점 없지고, 매운 거 못 먹는 나의 아이들의 밥을 해 주며 수도권에 살다 보니 빨간 뭇국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었지만 그것과 그것은 다른 것.
이번에 부산에 와서 저녁으로 숙소 앞 삼겹살집엘 가니 기본 찬으로 빨간 소고기 뭇국이 나왔다. 어머나, 이게 얼마만이야? 눈앞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뭇국의 자태에 넋이 나간다. 삼겹살이 채 익기도 전에 뭇국부터 후루룩 먹었더니 삼겹살 맛도 제대로 못 느낄 판. 부산까지 와서 회 한 접시 못 먹는 마음을 빨간 뭇국이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이런 맛이 있었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맛.
아이들은 맨 김 구운 것에 간장 찍어 먹는 맛에 푹 빠졌다. 조미김 아니면 김밥만 먹어보다 맨김에 싸 먹는 맛을 처음 본 것. 질기고 맛없다고 안 먹던 음식도 잘 먹는 걸 보니 그새 또 큰 건가 아니면 일곱 시간 물놀이의 시장기가 반찬인 건가 모르겠다.
전국 택배시대에 밀키트, 곳곳에 뻗어있는 프랜차이즈점이 있으니 이제는 향토음식이나 특산물의 개념이 모호해진 것 같아도, 그래도 그 지역에 여행 와야 만날 수 있는 맛이 있다. 그게 진짜 양념맛이든, 재료맛이든, 기분 탓이든, 시장기 덕이든 무엇이든 간에 여행 와서 먹는 맛은 집이나 동네에서 먹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게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