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는 순간 꿈은 현실이 된다 3화
내가 바란 댓가는 미래에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는 배움이었다.
사장이 되기를 꿈꾸었고, 부자가 되기를 꿈꿔왔던, 나는 어떠한 사업을 해야 할지 명확한 방향은 없었다. 매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나에게 20대 부터 알게 된 형님이 한분 계신다. 그 형님이 환경사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는 형님을 찾아가 사업에 대한 내용을 들었다.
형님 또한 나처럼 멀쩡한 회사, 대기업을 다니시다가 형님의 지인분으로 부터 알게되러 시작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형님과 자주 연락하는 사이였다. 형님 또한 일반 직장인에서 내가 꿈꾸는 사장님으로 바뀌고 그 일로 인해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건 이미 알고 있었다. 형님이 밟은 길은 나의 미래의 모습으로 비춰 졌었다. 그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환경사업의 내용은 음식점 또는 구내식당등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잔반을 수거해서 음식물처리장에 버리는 사업이였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언젠가는 나도 형님 밑에서 일을 배운 뒤 따로 나와서 그와 같은 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 당시 형님은 수년간 그 일을 진행 해와서 내가 일을 배울때는 직접적으로 본인이 수거를 하지는 않아도 수거 직원으로 만으로도 수익이 발생되는 어느정도의 시스템이 갖춰진 내가 꿈꾸는 사장님이 되어 있었다.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하루 아침에 힘들게 된 공무원을 때려 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일이라도 배워야지'라는 생각뿐이였다. 공무원은 직업상 겸직이 금지 되어 작은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었다. 먼저 일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갖음이 필요했다. 교대근무 시간을 이용하여 주간근무를 마치고 시간이 맞으면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그 어떠한 댓가도 받지 않고 말이다. 오직 내 미래를 책임질 일이였다고 생각이 들었다. 실제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 뿐이였다.
부자로 가는 꿈을 위해 시작한 첫 일이었다.
보통 음식물 수거는 비교적 차량통행이 줄어드는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시작이 되었다. 일의 방식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계약을 맺은 음식점 사장님들이 내놓은 점포 앞의 음식물 수거통에 있는 음식물을, 특수장치가 되어 있는 트럭에 싣고 통에 들어 있는 잔반을 비워준 뒤 처리장에 버리면 되는 일이였다.
운전에는 자신있던 나에게는 힘들지 않은 일이였다. 밤낮으로 일하는 교대 근무를 하던 나는 밤을 새는 것도 힘들게 느껴 지지 않았다. '나도 할수 있곘구나', '새벽에 좋은 공기도 마시고 좋네!' 라고 혼자 중얼 거리며 일을 배웠다. 주로 새벽에 일이 진행 되어 마주치는 사람도 없었고, 나만 열심히 하면 그날 주어진 코스를 처리하면 되는 일이였다.
경찰 주간 근무가 끝나면 보통 오후 7시, 8시 였다. 수거일 시작은 딱 정해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시간상 구애를 받지 않았다. 오로지 일을 빨리 습득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간이 날 때 마다 일을 했다.
주간 근무 이후에는 다음날 야간근무를 하는데, 야간근무는 보통 오후 7시에 출근을 하기 때문에 아침에 끝나고 충분히 자면 본업에 지장은 없으리라는 판단을 했다. 그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고 일을 배우기 위한 나만의 자기계발이기도 했기에 심적으로 불편함도 없었다.
어찌보면 아침부터 시작된 경찰일에 음식물 쓰레기 수거일까지 하면 하루에 24시간을 일하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 피곤할만 한데 과거의 나와 내가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나의 그 때 열정에 대해 박수 쳐주고 싶다. 어쨌든 당시에는 피곤함 보다는 내 미래를 미리 맛보는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규칙적으로 일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약 1년간 간간히 그렇게 일을 하며 보냈다.
어느덧 내나이는 30대가 되어 있었고, 30대초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내한테 형님의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러한 사업이 있는데 정말 발전 가능성이 있다. 차후에 그 일을 하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구했다. 아내가 안된다고 무 자르듯 자른 것은 아니였지만, 서로 논의를 깊게 하지 못했고 나도 그 일에 대해서의 확신을 심어 주기가 쉽지가 않았다.
기회와 꿈은 가까운 곳에서 불연듯 찾아온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평범하게 맞벌이를 하면 결혼 생활을 하며 지냈다. 장모님은 대구 지역에서 요식업을 하고 계셨다. 15년 넘게 돼지, 소고기 전문 식당을 당시 4~5개 운영하시고 계셨다. 항상 장모님을 봬러가면 집이 아닌 운영하시는 식당으로 가게 되었다. 하루는 장모님 가게에 방문을 했을 때이다. 어린아이들이 놀수 있는 음식점내 놀이방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놀이방은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았다. 아이들이 놀다가 다치지말라고 바닥과 벽에 붙여 놓은 보호매트 등은 떨어져 있거나, 장난감등은 누가 봐도 오래된 것들이었고, 부서진 장난감들이 널려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장모님이 매장이 바빠서 여기저기 뛰어 다니시는 모습에 정작 나는 가만히 앉아 있기도 불편해서, 막상 일을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자네는 좀 쉬고 있게"라고 하시는 장모님의 배려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담아서 '작은 놀이방을 꾸미기라도 하자'는 생각에 가까운 대형마트로 향했다. 그리고 놀이방을 보수할 용품들과 어린애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을 사왔다. 혼자서 내 방을 꾸미 듯이 하다 보니 나도 재미를 느끼면서 2~3시간 작업을 했더니 어느새 깔끔한 놀이방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당시 밥을 먹고 있는 아이들이 내가 놀이방 보수를 하고 있는 도중에도 관심을 보이며 들어 와서 놀면 안되냐며 일할 맛이 나게 기대하는 반응을 보였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누구한테 잘보이려고 했던것도 아닌데 그런것에 만족을 하는 내 모습을 느꼈다.
나는 음식점 사장이 되리라고는 꿈을 꾸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사실 외할머니는 50년간 작은 설렁탕집을 운영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돌아가셨지만, 작은식당을 운영하시는 할머니는 항상 쉬는 날도 없이 바쁜 모습이 어린 내 눈에 비춰졌었다. 게다가 우리 부모님 또한 내가 중/고등학교시절에는 호프집과 이동갈비집을 운영하셔서 음식장사가 쉽지 않다는걸 보고 자랐었다. 당시만 해도 음식점을 운영한다는 것은 남들에게 좋은 시선으로 비춰지지는 않았다. 지금이야 각종방송에서 맛집 방영과 유명셰프님들의 출현 및 백종원님등의 영향력 등으로 현재 외식사업이 과거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전과는 틀려진 것은 확실하다.
실제 그 위상을 반영하듯,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빅데이터를 통한 식품산업전망'을 주제로 한 발표에선 2023년 식품제조업의 매출액이 139조400억원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코로나 19발생 이전인 2019년 (126조5000억원)과 비교해도 약 13조원이 증가한 수치다. 올해의 외식업 매출액은 143조3000억원으로 전망했다.
내가 외식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시작이 되었다. 어렸을때 봐왔던 할머니와 부모님, 결혼후 장모님 가장 가까이 계신 분들, 하물며 가깝게 지냈던 형님의 환경 사업 모든 시작은 가까운 곳에 존재했다. 나는 그 가까운 곳에 보였던 외식 사업이 현재의 시대적 흐름에서 보여주는 기회를 잡았을 뿐이다.
앞으로 나와 끼리끼리가 되어줄 사람은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
끼리끼리라는 말은 정말 무서운 말이다. 나와 끼리끼리라고 불려질 수 있는, 나와 어울리는 부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될지 스스에게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그게 내가 가야할 노는 물의 비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외식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맹사업을 처음부터 꿈꿔 왔었고, 현재는 해썹인증을 받은 자체 보유 중인 축산물, 식품제조공장까지 운영 중에 있다. 단순한 음식점 사장님을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외식 사업을 하는 대표가 되고 싶은 것이다.
백억하누는 엊그제 시작한 것 같은데 어느덧 10년된 매장이 되어 있고, 자체 HMR제품도 판매하면서 나름 꾸준한 매출을 만들어 가다 보니 어느새 나도 중소 기업의 사장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 사장이라는 소리가 어색하게 들렸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사람들은 나를 대표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바쁘게 달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소망하던 사장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사장이 되고 싶던 아이는 내가 가진 꿈이 실현되어 있었다. 그 꿈은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