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는 순간 꿈은 현실이 된다 5화
나는 군생활을 의무경찰에 자원 입대하여 운전병으로 지낸 뒤 전역을 했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닭장차를 모는 운전병이었다. 지금은 신식 버스로 변경이 되어 깔끔한 경찰버스의 모습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래도 버스 외부에 시위자들이 혹시나 던지는 물건으로부터 차량 및 내부에 승차해 있는 대원들의 보호를 막기 위해 버스 창문에 닭장 마냥 설치물을 설치해둔 버스의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그러한 의무경찰 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했을 때만 해도 경찰이 어떻게 되는지 관심도 없었다.
공무원이 내 눈에 들어 올리는 없없다.
나의 꿈은 '부자'였기 때문에, 월급쟁이면서 박봉인데다가, 경찰처럼 민원 스트레스가 큰 공무원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인 법이다.
나의 현실은 군대 제대 후 집안의 사정은 더욱더 안 좋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모아 놓은 돈을 어떤 회사에 투자를 했는데 그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것이다.
의무경찰이다 보니 서울 도심에서 근무를 하여 잦은 휴가를 나오는 편이었던 나에게 부모님께선 "너는 군대 간 놈이 왜이렇게 집에 자주 오냐?" 농담을 하시곤 하며 면회 한번을 오지 않으셨었다. 그런데 제대를 한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 갑자기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부모님이 부대로 면회를 오셨다. 당시 내 통장에 현금 500만원 정도가 있었는데 그 돈을 나에게 빌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었다.
황당했다. 제대 후 나름, 친구들과 축하파티도 하고 싶고, 군인의 티를 벗은 모습으로 어떻게 멋을 부리고 놀아 볼까라는 생각과 인생 첫 해외여행으로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등에 놀러 갈 계획도 세웠는데 말이다.
하지만, 부모님이 오죽 급하시면 아들놈 돈을 쓰겠다고 오셨을까 싶었기에, 자초지정을 차분히 듣고 "그 돈을 꿔 드릴테니 제대 후 한달 이내에 주세요"라며 부모님께 내 재산의 전부를 드렸다.
그리고 그날 이후 제대할 때까지 나는 내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고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였다. 참...사람이 가까운 것만 보인다고 2년 동안 생활하고 보고 들은 게 경찰이라, 그때 생각한 것이 바로 경찰공무원이었다. 결국 내가 익숙하게 느껴진 안정적인 그 길을 가자고 선택한 것이다.
경찰공무원시험의 준비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부모님이 아들의 쌈짓돈을 빌려가실 정도로 여의치 않은 가정형편에, 내가 선택한 경찰시험을 준비하면서 하루하루의 최소 생활비와 한달 생활비는 부모님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물며 제대 한달 전 빌려드린 돈으로 시작하게 된 내 수험 생활은 '이 돈이 다 소진되면 과연 부모님이 내 뒷바라지를 해주실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수험생활을 하게 되면셔 이것 저것 돈이 필요한 일이 계속 생겼다. 수험서가 개정되어 반드시 사야하는 기본서와 문제풀이 등의 책값과 높아지는 학원비, 고시원비, 식비 등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최소로 필요로 하는 무기를 갖기 위해선 곧 돈이 필요했다. 공무원 수험생이 아니더라도, 수능이나 자격증 공부를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지금 나도 두 아이의 가장으로써 아이들이 배우고 싶은 것들을 모두 시키고 싶지만, 시간적 여유도 그렇거니와 학원비가 부담가기는 마찬가지다. 나를 닮아서 그런지 내 자식들도 왜이리 배우고 싶은게 많은지 싶을 때가 많은지, 뿌듯하고 기특하면서도 왠만하면 내가 누리지 못한 것을 내 자식은 누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런 입장이 되고 나니 그 당시 부모님은 지금의 나보다 얼마나 더 큰 부담을 느끼셨을지 안타깝기도, 당시에는 감사의 표현이 부족했던 것만 같아 죄송스럽기도 하다.
이같은 상황에서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군대는 시간이 지나면 제대라는 결과물을 찾아오지만, 수험생에게는 합격이라는 결과가 정해놓은 기간에 나올 수가 없을 뿐더러, 합격과 불합격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하기에 달려 있었다. 그 누가 시켜서한 일이도 아니도 내자신이 선택한 길이였기 때문에, 그 누구한테도 핑계를 댈 수도, 타인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그야말로 시간이 돈이었다. 행여 수험 생활이 길어지면 중간에 알바라도 해가면서 버텨야 하는 상황이였고, 합격이라는 결과물은 무조건 빠른 시기에 가지고 와야 하는 상황이였다.
'승호는 독해!' 라는 말을 들었다.
경찰 시험을 준비할 때 들은 말이다. 나는 살면서 남에게서 독하다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독하다고 평가받을만 했던 것 같다. 자타공인, 그야말로 독하게 매일을 살았다.
노량진에서 수험생활을 하다 보면 여럿 유형의 수험생을 볼 수 있다. 모든 수험생이 그렇지는 않지만 수험생활을 핑계로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어떤 친구는 pc방에서 게임에 빠져 있거나, 또 다른 부류는 학원이나 독서실에 얼굴도장만 찍고 개인생활에 집중하거나, 매일 같이 당구장, 술을 마시며 학원이나 독서실이 아닌 거리에서 항상 취해 있는 친구, 서로 수험생끼리 눈이 맞아 아름다운 연애를 즐기는 친구들 등, 다양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당연히 그런 유형의 수험생들 짧게는 3년, 길게는 7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노량진에서 보내고, 경찰이라는 결과가 아닌 다른 일을 하러 발자취를 떠나는 경우가 대다수 이다. 그러한 모습은 보면 한없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간혹 그러한 모습이 너무나 부럽기도 했었다.
나도 젊은 나이에 저들과 같이 술 한잔 하거나 지긋지긋한 군대 제대 만을 기다렸는데 제대 후 군대보다 더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안쓰럽기까지 느꼈다.
내가 독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확실했다. 가진 게 없는건 사실이고, 시간은 돈이였고, 포기를 하면 그 어떠한 이도 나를 위로 해주지 않을 거하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장사와 사업을 하면서 그 때 들었던 '독하다'는 말은 이후 워커홀릭, 일에 미친놈, 일 열심히 하는 사람 등 다른 표현으로 바뀌었는데, 결국 나는 남들의 눈에는 독하게 매일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으로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독하다는 말은 나에겐 칭찬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상황들은 나를 더 강인하게 만들어 줬고, 그런 강인함으로 그 이후 일들 또한 열정을 가지고 진행을 해나가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독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독하다는 소리는 부정이 아닌 긍정이다. 자기뿐이 모르는 이기적인 그런 말로 오해 하면 안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될것이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이 당신의 미래에 있어, 과정이 되고 그름이 되는 일이라면 열심히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독하게 해라.
예전이나 지금의 나처럼 나에게 있어 시간은 돈이다. 급여를 받았을때는 내가 200-300만원의 가치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현재의 나는 한달에 1억의 가치를 하는 사람이 되는 목표를 가지고 달리고 있다. 그렇게 나의 가치를 계속 키워나가다 보면, 내 미래에는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아고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돈이 들어 오리라 믿고 있다.
나는 더욱더 독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유복하지 못한 지난 세월을 가지고 부모님을 탓하기 보다 그런 환경 속에서 바르게, 자기주도적으로, 부자라는 확신을 가진 내 꿈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심에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부와 가치의 한계에 대한 경험과 깨달음을 만들어주셨기에 오히려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제 생각이 바뀌고 그걸 바꾸기 위한 실천을 할 수 있었기에 지금처럼 더 큰 결과를 만들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