웡카 (Wonka)
감독: 폴 킹 (Paul King)
2024년 개봉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웡카> 포토. https://search.daum.net/search?w=tot&DA=YZR&t__nil_searchbox=btn&sug=&sugo=&sq=&o=&q=%EC%9B%A1%EC%B9%B4
영화 <웡카>을 리뷰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상은 구조의 위에 존재한다. 구조는 현상의 아래에 존재한다. 현상은 구조를 통해 발현된다. 대체로 구조는 권력에 의해 가려진다. 구조를 향해 이유를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구조를 탐색하고 전복하려는 시도는 무참하게 짓밟힌다.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는 십중팔구 몽상가 또는 정신병자로 취급받는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조는 언제나 한 자리에 견고하게 존재하는 너무도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가끔씩 구조의 크고 작은 결함이 현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조금만 손보고 고쳐서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라고들 기대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웡카>에는 구조를 만들어 현상을 통제하고 이득을 취하는 자가 무더기로 등장한다. 도시 전체가 초콜릿 카르텔에 의해 지배당한다. 초콜릿을 수단으로 성직자와 경찰이 모두 매수당했다. 그들은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움직이지만 결국 그들의 모든 행위는 초콜릿 카르텔 삼인방의 이득으로 귀결된다. 삼인방은 가히 구조의 꼭대기에 선 지배자이자 권력자이다. 그들의 구린내 나는 담합은 현상을 살아가는 다수의 시민들은 결코 알아내기 힘든 곳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구조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스크러빗 부인과 블리처가 운영하는 세탁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운영하는 것은 여관이 아니다. 세탁소다. 허무맹랑한 조건의 계약과 불법 감금 및 노동으로 운영되는 세탁소. 이 조악하고도 잔인한 구조를 굴려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여관으로 위장한 미끼인 것이다. 덫에 걸려든 순진한 사람들은 현상의 아래에서 열심히 빨랫감을 문지르고 다림질한다. 그들의 세탁 노동은 인간 컨베이어 벨트가 따로 없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번 돈은 스크러빗 부인과 블리처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그러나 아무도 이 말도 안 되는 세탁소의 만행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없다. 블릿처의 몸집이 큰 것은 사실이나 상대는 둘이고, 세탁소에 감금당한 사람들은 웡카까지 여섯이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바깥에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다. 스크러빗 부인과 블리처는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왜 이들에게 아무도 맞서지 않았을까? 이것이 바로 구조의 힘이다. 구조는 필연적으로 개인을 무기력하게 한다. 구조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순식간에 자동적으로 그 힘을 우리에게 발휘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구조의 영향력 아래에 지배당했기 때문에 새로 그 구조에 편입되는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규칙과 규범에 따를 수밖에 없다.
세탁소의 경우 모두가 계약서에 서명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싫든, 좋든. 그 행위가 강제적이었든, 자발적이었든. 내용이 허무맹랑하든, 타당하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계약에 서명한 것은 구조의 운영과 지속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였음을 의미한다. 동의하고 싶지 않다면 그저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된다. 그러나 침묵을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뒤에서 방망이를 들고 다가오는 블리처처럼 구조는 때때로 개인에게 폭력적이다.
웡카는 아케이드의 광장에서 경찰에게 저지당한다. 경찰은 웡카에게 벌금까지 물리는데, 그의 죄목은 공상(daydreaming)이다. 공상은 구조를 전복시킬 힘이 있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 중 하나다. 현상을 바꾸고 싶다면, 그리고 그 바뀐 현상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구조에 손을 대야 한다. 그리고 구조를 뜯어고치는 일은 다수가 오랫동안 감히 도전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에 상상력이 우선적으로 동원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만약 경쟁이 없는 한국의 교육 환경을 원한다면,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우선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를 가정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대번에 무시당한다. 현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망상에 가까운 이상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심지어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핍박받고 시달리는 개개인들이 오히려 괴상망측한 구조를 옹호하고 나서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에서 공상을 하는 웡카는 현상의 오류이자 구조의 눈엣가시다. 웡카는 시장의 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훨씬 더 품질이 우수한 초콜릿을 판매하는데 구조의 입장에서 이는 시장 교란 행위다. 꿈과 공상이 현실에서 실현이 되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나 공상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목표가 된다. 웡카에게 그 목표란 초콜릿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겠지만, 초콜릿 카르텔에게 웡카의 목표는 구조의 전복처럼 보인다. 웡카의 공상이 공상으로만 남고, 그가 도시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쫓겨나야만 하는 이유다. 어쩌면 실현 가능했을지도 모를 웡카의 목표는 현상의 오류로써 말끔히 제거되고 초콜릿 카르텔 삼인방은 또 한 번 굳건히 구조를 지켜낸 사회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웡카는 거침없이 초콜릿 카르텔의 퀴퀴한 우물을 들쑤신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행동은 도시 전체를 지배하던 낡은 통념을 뒤엎었다. 초콜릿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 싸고 맛있을 수 있었다. 심지어 초콜릿은 강이 되어 흐르고 분수대 위로 뿜어져 나올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그러지 말라는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웡카가 도시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이방인을 낯선 시선으로 경계하듯 이방인도 우리를 낯선 시선으로 본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프레임을 가졌다. 그래서 이질적이고 때로는 불편하지만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저 공상이라 치부할 수 있지만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것이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관념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는 것을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말이 어려운가?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 혹은 너무도 익숙해져서 아예 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던 것.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이방인의 시각이 필요하다.
웡카는 영토에서 추방당한 움파 룸파와 함께 자신들만의 초콜릿 세상을 만들러 떠났다. 그 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이야기다. 그들만의 세상. 그들만의 왕국. 그들만의 구조를 만든 웡카와 움파 룸파.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
hiphopstep.
참고문헌
데니스 뇌르마르크 , 아네르스 포그 옌센. (2022). 가짜노동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이수영, 역). 자음과 모음.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웡카> 포토. https://search.daum.net/search?w=tot&DA=YZR&t__nil_searchbox=btn&sug=&sugo=&sq=&o=&q=%EC%9B%A1%EC%B9%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