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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힙합스텝 Mar 09. 2024

거기에도 네가 원하는 삶이 없으면 어떡할래?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감독: 셀린 송 (Celine Song)

2024년 개봉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패스트 라이브즈>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ae0a2a0c733c730f21b60d9e46914d82198bed4e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를 리뷰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패스트 라이브즈>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2b4217a2e46e78d4e3798fa5e8c760d3f57e52c8

나는 곧 한국을 떠난다. 박사 과정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는 하루빨리 지방 촌구석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서울로 대학에 오고 나서는 한국을 뜨고 싶어졌다.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 나는 말 그대로 떠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떠나고 싶어 하는 나를 곁에서 늘 지켜보았다. 떠나간 자리와 떠나온 자리에서 갈팡질팡 하며 나는 변화를 겪었다. 누군가는 그 변화를 성장이라 불렀고, 나는 많이 아팠으며, 엄마는 내게 길고 긴 사춘기를 겪는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가족이 있는 집도, 더 큰 세계를 꿈꿨던 서울도,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 친구들이 있는 한국도, 그 어디에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무척 가려웠다. 시원한 구석이 없었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행복하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불행하지 않은 것에만 만족하며 살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행복하고 싶었다.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행복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패스트 라이브즈>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9960d7eeb9153355b49ed73aca5d0530789c873b

한 번은 대학원 동료에게 나는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심리학 박사를 취득하고 연구해서 어떤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도 했다. 글 쓰는 걸 좋아하니 어쩌면 노벨 문학상에 도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노벨 생리의학상이나 경제학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국을 떠나 북미에서 공부를 더 하고 자리를 잡으면 노벨상에도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일단 한국을 떠나는 것이 노벨상의 전제 조건이다. 나는 그것이 슬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어린 나영은 한국에서는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무덤덤하게 한다. 2024년인 지금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국인은 아직 없다. 나영은 그렇게 태평양을 건너 노라가 되었다.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패스트 라이브즈>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4d7a421678ae31dd78425318971a7156f074957d

한국에서 노벨상은 꿈이었지만 미국에서 노벨상은 목표가 된다. 꿈은 이룰 수 없기에 꿈이다.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꿈이 아니다. 목표다. 꿈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꿈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 꿈은 달콤하다. 꿈은 내 몸을 공중에 붕 뜨게 한다. 꿈은 매력적이다. 심지어 악몽에서도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쉽게 부풀었다가 쉽게 꺼지는 게 꿈이니까. 그러나 목표는 무거운 것이다. 꿈은 닿을 수 없지만 목표는 닿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작동한다. 목표는 때때로 나를 짓누른다. 달성하지 못한 목표는 나를 힘겹게 한다. 좌절하게 한다. 나영에게 노벨 문학상은 꿈이었지만 노라에게 노벨 문학상은 목표다. 노벨상에서 퓰리쳐상으로 퓰리쳐상에서 토니상으로. 노라의 목표는 바뀌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노라는 더는 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패스트 라이브즈>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a75facdb67b72f44aa5ace23f71cc87449a6e627

꿈이 목표로 전환되고 목표의 좌절을 경험하는 이민자들은 슬프다. 떠나는 사람은 두려움에 시달린다. 막상 그곳에도 내가 원하는 삶이 없으면 어떡하지? 십 년 전 지방을 떠나 그토록 바라던 서울에 왔을 때 나는 크게 좌절했다. 내가 바라던 삶은 서울에 없었다. 내가 그리던 사람들도 서울에 없었다. 서울은 그저 한국의 다른 많은 도시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갑갑함을 느꼈다. 내가 바라던 삶의 정체가 흐릿해져만 갔다. 바다에 가고 싶어 바다를 향해 죽도록 헤엄쳤더니 사실 내가 원래 있었던 곳이 바다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꿈꿨던 바다는 이런 꼴로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바다는 더 크고 더 푸르고 더 찬란해야 했다.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이 아닌 그곳도 바다가 아니라면 나는 그다음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다시 돌아가야 하나.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패스트 라이브즈>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4113938c8da452784dcb26864b684490ac4c525b

이번 생에서 해성과 나영은 인연이 아니었다. 나영이 노라가 되어 태평양을 건너온 것처럼. 해성은 그녀에게 이미 떠나온 곳이다. 남편인 아서는 노라가 스스로 타협한 종착지이자 정착지이다. 아서는 자신이 어린 시절의 연인이자 운명의 인연 사이에 훼방을 놓는 사악한 백인 남성의 역할일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아서는 빌런이 될 수 없다. 그가 빌런이 되기를 자처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해성이 아닌 아서를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노라 자신이기 때문이다. 무한의 선택지 가운데 무엇 하나를 선택하는 자유는 내게 있지만 그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도 자기 자신이다. '그때 내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과 같은 가정법은 지금에 와서 소용이 없다. 멀티버스는 SF나 판타지에나 존재하는 세계관이다. 노라는 태평양을 건너듯 다중우주의 세계로 건너갈 수가 없다. 그녀는 나영에서 노라가 되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녀가 이번 생에서 선택한 삶은 해성이 아니라 아서다. 불행하지는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은 것 같다. 가끔 행복하겠지만 그것이 노라가 꿈꿨던 행복인지는 잘 모르겠다. 해성에게로 돌아가면 그녀는 충만한 행복을 느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패스트 라이브즈>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64026a312a395e03b03e8754d0f3c7d2b22a133d

나는 곧 한국을 떠난다. 가족의 품에서도, 친구들의 곁에서도, 한국어를 구사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나는 언제나 이방인인 것 같은 기분을 느꼈으니 차라리 외국에 가서 진짜 이방인이 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노벨상을 받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다. 노벨상은 애초에 받기가 어려운 상이다. 내가 원했던 삶이 한국의 바깥에도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그 사실을 안다. 그래도 떠난다. 이번 생에 한국은 나와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슬프지만 이렇게 된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어쩌면 전생(Past Lives)의 내가 만든 숱한 인연들과 업보로 인해 이번 생에 이렇게 태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영은 노라가 되었다. 해성은 해성으로 남았다. 나는 무엇으로 불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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