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손에서 칼을 내려놓고, 그 전쟁터를 떠나야 합니다."
공식적으로.. 라고 해야 하나.
나의 재해일은 21년 3월.
실제 나의 재해일은 그로부터 수개월 전이지만, 정신과에 처음 내원한 날짜가 나의 재해일이 되었다.
벌써 정신과에서 우울증을 치료한 지도 언 2년 하고도 반년이 되었다.
네이버 블로그에 산재에 대한 글을 쓰면서, 문의를 주셨던 많은 분들께서 궁금해하신다.
'우울증은 이제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분들께서 나의 블로그까지 와서 문의를 주신 까닭은, '직장 내 괴롭힘'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정신 질환 산재 신청' 때문이셨을 테니, 궁금하실 것이다.
나의 우울증이 많이 좋아졌다면, 또 다른 희망을 얻으실 테니.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우울증은 '많이 좋아졌다'라고 당당히 말하기엔 썩 좋아지지 않았다.
사실, 좋아진 순간들도 분명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블로그에 산재 신청에 관한 글을 공유해야겠다 마음먹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용기를 내어 세상에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다른 분들을 도와드릴 수 있게 되었을 테니.
하지만 올해 1월, 실업급여 수급 연장 신청을 위해 회사에 연락을 하면서부터 나의 우울증은 급속도로, 아주 급격히 나빠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약 2년 만에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회사의 인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받아낼 수 있었다.
처음 대표에게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하고 한 달이 넘는 외부 노무법인의 조사를 받은 후, 대표에게서 받은 조사결과 메일의 내용은 나를 병원 앞에서 쓰러지게 만들었다.
조사 결과, 내가 주장하는 모든 괴롭힘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인정해 줄 수 없다. 모두 불인정한다.라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그리고 올해 1월, 드디어 회사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했다.
실업급여 수급 연장 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실업급여 수급 대상자가 되어야 했는데,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하지 않았던 회사는 나의 이직확인서를 신고할 때 '그냥' 자진퇴사로 신고했다.
회사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자진퇴사로 수정하여 신고할 것을 요구했고, 단 며칠 만에 회사는 결국 수정해서 신고했다.
'2년.'
정말 오래도 걸렸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것을 드디어 이뤘다.
그런데 왜 우울증이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것일까?
이직확인서가 수정된 것을 확인한 순간.
단 몇 초였던 것 같다.
'하나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물이 정말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이 펑- 펑- 쏟아졌다.
감사함, 개운함, 안도감, 위로를 받은 듯한 감정들이 들었던 것은 정말 단 몇 초뿐이었던 것 같다.
그 후에 갑자기 밀려온 수많은 감정들은 나를 나락으로. 어쩌면 이곳이 지옥인가 싶은 곳까지 끌고 갔다.
더 큰 억울함, 더 큰 원망감, 더 큰 괴로움, 우울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세상에 있을 법한 신이란 신들께 숨도 쉬지 못하고 꺽- 꺽- 울어대며 간절히 빌었던 것이었다.
드디어 그 길고 긴 싸움에서 나는 승리를 거머쥐었건만.
도대체 왜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잃은 것만 같지?
정말 다 가진 기분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다 잃은 것만 같을 수 있는 걸까.
정신과 교수님을 찾아갔다.
드디어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나를 괴롭혔던 인물들이 모두 퇴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도 말씀드렸다.
그리고는 목놓아 울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정말 다 잃은 기분이라고, 마음이 너무너무 괴로워서 도저히 못 살겠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럴 거였다면 처음부터 인정해 주지, 사람을 2년이나 그렇게 못 살게 굴더니만 이제 와서 이렇게 쉽게 인정하니 그저 너무 허무하고 허망할 뿐이라고.
그때, 2년 전에 인정해 줬다면 나는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정말 모든 것을 잃었다고, 엉엉 울었다.
교수님께서는 천천히 설명해 주셨다.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처절하게 전쟁을 했다.
그리고 현재, 그 길고 길었던 전쟁은 끝이 났다.
나는 승리했고, 이 전쟁터에는 남은 이 없이 모두가 떠났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눈을 가리고 텅 빈 전쟁터에 홀로 남아 아직도 칼을 휘두르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셨다.
"이제 그만 손에서 칼을 내려놓고, 그 전쟁터를 떠나야 합니다."
모두가 떠났다고 했잖아요. 괴롭혔던 관련 인물들이 모두 퇴사했다고.
이제 하라씨도 그만 그 전쟁터를 떠나셔야 합니다.
모두 끝났어요.
나의 우는 소리를 제외하고, 잠시 진료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제가.. 이제.. 갈 곳이 없어요..."
이 전쟁터를 떠나려고 하니, 갈 곳이 없다.
정말, 갈 곳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교수님께서는 또 한 번, 천천히 설명해 주셨다.
"당연하지, 내 인생의 목표가 그것 인양 살았는데, 나의 삶의 목표가,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받는 것.' 그 외에는 없는 것처럼 살았는데."
'나는,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받을 거야. 그리고 그다음에는~'이라는 목표가 있었어야 했는데
'내 삶의 목표는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받는 것이야!'와 같이 살았으니, 당연히 갈 곳이 없을 수밖에, 당연히 삶이 끝난 것 같을 수밖에.
다음이 없었다.
다음 목표가 있었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 전쟁이 너무나도 처절해서, 이 전쟁이 끝난 후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전쟁이 끝나고 나니 모든 것을 잃은 듯했다.
갈 곳도 없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삶이 온통. 텅 비어버린 듯했다.
"다음 목표를 세워야죠."
교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제,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으니, 끝났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다음 목표'를 만들자고.
문제는, 모든 것을 잃은 나에게 다음을 생각할 의욕 따위가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약 반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다음 목표를 세웠을까?
아니, 사실은 아직 다음 목표를 세우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다시금 점차 나아지고 있고, 회복 중에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싶다.
당장 공유하고 싶은 것은 우울증 극복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산재에 대해서도,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서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빌런들에 대응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도.. 정말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공유한 것들을 통해 단 한 명이라도 희망이 되었던, 도움이 되었던, 무엇이 되었던, 긍정적인 것을 단 한 가지라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나와 같은 아픔을 겪은 누군가에게,
너만 그런 힘듦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니 함께 힘을 내어 다시 일어나 보자고, 너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결국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내가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그 말들을, 꼭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