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와 사르트르,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를 나름대로 읽어보면서 나를 둘러싼 환경에 익숙해지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이 통찰했듯이 사고가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의도는 왜곡되기 마련이므로 명징한 결론을 내기는 어려웠지만, 이것을 글로 적어내려가며 주어진 상황을 낙관할 수는 없더라도 긍정해보자는 생각을 계속 해왔습니다.
따라서 원래는 이 글 말고도 ‘부조리’를 중심으로 한 다른 에세이를 적고 있었습니다. 부조리의 발단과 양상,결과를 다루려고 했고 주요 키워드로는 ‘통제할 수 있는 것’, ‘정체성’, ‘시선’, ‘취향’ 등을 생각했습니다. 다만 이것을 써내려가면서 나의 이해는 글로 담아내기엔 아직 불완전한 수준이라고 진단하고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부조리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내세웠지만, 생각만 깊어지고 결론과 실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카뮈의 반항이라는 개념은 결국 인간과 세계, 둘을 잇는 부조리의 방정식에서 도출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에게는, 부조리에서 가능한 경우의 수를 (자살, 종교적 희망, 일상으로의 회귀) 하나하나 소거하는 것만으로는 미래를 갈망하게 만드는 목표와, 지금을 남김없이 살아내는데서 오는 현재의 고통 사이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괴리를 해소할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레비나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아의 초월의지가 아닌 타자와의 합일을 바라는 과정에서 나오는 존재의 고통; 내가 아무리 뛰어나고 자유롭더라도 내가 이 정체성에 갇혀서 살아가야 한다는 모순에 대해, 그는 존재의 정복을 행하는 남성성과 사랑의 여성성이 결합된 자식의 잉태를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인생의 흐름을 매우 훌륭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결국 자기혐오의 고통이 시간성의 문제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도출해낼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건 철학적 사유의 결과라기보단 오독의 여지가 가득한 제 일기장일뿐입니다. 아무튼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길러주는게 철학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결론에 쉽사리 도달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나의 무지를 외부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서 시작한 공부였는데, 어느새 공부가 안될 때마다 외부를 탓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존재의 매인 붙박이'라던가, '타자론'이라던가 꽤나 나의 상황을 납득시켜줄 것만 같은 번지르르한 표현에 매료돼 목적의 전치가 일어난겁니다. 그것을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어진 군생활에 대입해보며 한동안 위안을 얻는듯 했으나, 사실 정답이 없는 존재의 문제 속에서 속은 점차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최근에 관심 깊게 읽었던 구절을 조금만 나열하더라도, 제가 어떤 사유의 정당화 과정을 거쳤는지 짐작하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다 더 유능하다는 장점이 내 존재의 불안과 고통을 전혀 덜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이 보편적 의미를 띤 사태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동일자의 자기 회귀라는 방식으로 운동하는 존재의 지평 속에 있는 한, 내가 더 많은 가능성을 지녔다는 우월성이 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의 고통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처치에서 존재의 고통은 하이데거가 생각하듯 내가 가진 자유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예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인생에 대한 불만의 궁극적 뿌리는 불우한 가정환경,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직업, 가난함 등 잡다한 제약들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철학 아카데미
게다가 6월은 입대하고도 가장 훈련이 유독 많았습니다. 곧 유격을 앞두고 있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외부적인 요인으로 공부의 습관화에 번번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내가 차선으로 선택하는 살인적인 동기부여에 관한 근본적 물음;
1.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2.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지위란 뭘까?
3.이 결정은 타인들로부터 자유로운가?
와 같은 물음에 명확하게 답해보는게, 상황을 인식하는데에만 치중한 철학보다도 책상에 앉기까지의 더욱 의미 있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1. 지위의 불확실성
과정이 공정하다는 착각
자본주의 체제에서 ‘1만시간의 법칙'으로 대표되는 노력지상주의는 정당하며 때로는 절대적으로 신봉되기도 합니다. 서열화가 익숙한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저 역시 시스템을 의심하기보단 도리어 역이용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처음 중간고사를 보고, 356명 중 170등 언저리의 석차를 받아들고는 막연하게 인서울이라도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너 성적으로?”라는 말과 께름직한 조소로 일관했던 친구에게 저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친구가 수업시간이나 자습시간에 자도 절대 깨우지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오래 앉아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꼈고, 나에게 3년을 달리게 해준 그 친구에게 대학에 오고나선 되려 고마웠습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지위를 쟁취해왔고, 인간의 능동성과 엘리트주의의 이분법성에 물들어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건 제가 온실 속의 화초였으며, 의지와 무관한 부조리에 노출되지 않았었기에 가능한 우연의 결과라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중간고사를 일주일 앞두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의대 진학반 동기가 아직까지도 입시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걸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친구는 엄청난 유망주였지만, 그 트라우마와 상처는 그 시기에 극복되기엔 너무나도 버거운 것입니다. 노력만으로 지위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대다수가 진보의 혜택으로 부조리의 실체를 모르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요.
노력지상주의
노력지상주의의 위험성은, 객관적으로 통제 밖에 있는 요인을 두고 노력의 부족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문제점은 실패자에 대한 낙인으로 심화됩니다. 일단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정당화하며 지위와 노력을 대응시키고 나면, 그 지위를 갈망하는 집단의 모든 이들은 심각한 불안에 빠지며 자연스레 사회에 만연한 서열화의 인식에 동참합니다. 지위투쟁의 결과로써 얻어지는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은 더욱 굳건해지며, 따라서 지위에 대한 갈망은 노력의 승화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 운, 환경은 의지와는 무관하게 존재합니다. 그것을 이해하는건 우리의 범주를 넘어서므로 선명한 부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적인 지위
따라서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불확실한 명제보다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노력 말고는 없다’는 사고방식이 꾸준한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합목적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일매일의 노력 끝에 내가 바라고 있는게 무엇일지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보입니다.
우선 전문성과 배타성을 갖추고 싶습니다. 서열화 논리를 차치하고라도, 나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필요하고 전문성은 그걸 실현하면서도 공부를 꾸준히 해온 내게 가장 익숙한 경로 중 하나입니다. 물론 가끔씩 음악이나 글쓰기에 전념하는 삶을 사무치게 동경하기도 하지만, 운과 재능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지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지금은 듣고 쓰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려고요. 따라서 전문성으로 보장된 적당한 경제적 자유를 통해서 음악과 글쓰기를 향유하는 일과 삶의 균형, 그게 제 지향점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자의적 결정처럼 보이는 나의 이상적인 지위조차도, 사실 대부분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결정된다는 점이 아마 제 평생을 따라다닐 것으로 보이는 두번째 문제의식의 발단이 됩니다.
2.타자의 시선과 인정투쟁
타자의 이중적 지위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주인공 신지를 제외한 모든 인류가 사라지는 상황을 가정해, '나와 타인의 관계로 정의되는 세상'으로 대표되는 실존주의의 핵심을 설명합니다. 실존주의는 데카르트로부터 이어진 '유아론'을 비판하고, 역사 속에 귀속된 채로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타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합니다. 확실히 인생은 타인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확립하는 과정의 연장선입니다. 그러나 타인을 통한 자기 인식은 우리가 정의되는 방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래의 사례로 타자의 이중적 지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공원에 있다. 내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잔디밭이 있고, 이 잔디밭을 따라서 의자들이 놓여있다. 이때 한 사람이 의자 옆을 지나간다. 나는 이 사람을 본다. 나는 그를 하나의 객체로서, 그리고 동시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 파악한다. 그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또 내가 이 인간을 한 명의 인간이라고 말할 때, 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내가 가령 질투심에 불타서, 관심을 가지고서 또는 못된 버릇 때문에 문에 귀를 대고 자물쇠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본다고 상상해보자.(...)그런데 갑자기 나는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군가에 의해 바라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존재와 무1, 장 폴 사르트르
첫번째 사례에서 그를 하나의 객체로 파악함은, 본질이 실존에 선행하는 사물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두번째 사례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상황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보인다는건, 우리의 평가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으며,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자신에 관한 비밀이 누출된 채 객체로 인식된다는 뜻입니다. 한편 우리가 누군가의 시선 아래에 있듯이, 우리도 누군가를 시선 아래에 귀속시킬 수 있습니다. 첫번째 사례에서 그를 하나의 객체로서 파악한다는게 이에 해당합니다. 그를 한 명의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그를 바라봄과 동시에 나도 시선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그의 존재를 '타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미셸 푸코의 판옵티콘도 절대자의 시선에 영감을 받아 창안된 개념입니다.
객체화에 대한 인상이 어떠신가요? 객체화는 불쾌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분명 우리는 타인을 통해 모르고 있던 모습을 발견하고, 취향의 심미안을 형성하며, 행동의 규범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기억되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곡해되며, 나에 대한 남의 인식을 통제하는건 불가능해보입니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출현은 나의 세계를 순식간에 소멸시키는 내출혈로 비유했습니다. 타인은 우리의 거울인 동시에 지옥입니다.
인정투쟁
이제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원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기 위한; 어쩌면 불가능해보이는 과업을 달성하고자, 우리는 끊임없는 시선의 상승과 하강 게임을 반복합니다. 사랑은 자신과 타자를 모두 주체로서 인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렵고, 고생 끝에 얻은 지위는 타인들의 시선 속에서 객체화되기에 유지하기 더욱 어렵습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호네트의 인정투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이상적인 지위라는 것도, 인정투쟁을 통해 참된 나를 공고히 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가 세상에 혼자 존재하는데 미쳤다고 매일 공부하고 운동하며 SNS에 이렇게 글을 쓸까요? 저는 다만 인정받고 싶을 뿐입니다. 그것은 제 현학성일 수도, 전문성일 수도, 같은 취향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함일 수도 있지만 이 뒤얽힌 감정 아래에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인정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불확실성 속에서 매일매일 공부하는 나의 모습을, 타인을 통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인정받고 싶은겁니다.
결론
지위에 대한 갈망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경쟁이 이념이 된 시대성을 통해 강박을 자아내며 결국 위 모든 개념을 포괄하는 상위개념은 불안입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므로, 다른 이가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말했습니다.
“지위를 통한 인정욕구의 충족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하다.” 그게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제가 더 불안했던거 같아요. 하염없이 보낸 아픈 과거를 뒤로 하려고, 지인들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시간이 아까워서 뭐라도 붙잡고 읽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심리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정욕구라는 것은 본능에 가깝기에, 저는 ‘미움받을 용기’라던가 ‘독고다이’와 같은 표현들을 믿지 않습니다. 설령 혼자 행동하고 계획하더라도, 그건 항상 타인을 의식한 결과였습니다. 저는 한때 블로그 방문자 수와 인스타그램 스토리 조회를 수시로 확인하곤 했으며, 특정인을 의식해서 스토리를 올린 적도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내 사람들에게만 받아도 족한 인정을, 불특정다수로부터 오는 관심이 부족하다고 착각했던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공부가 안될 때마다, 불침번 근무를 설 때마다 전역과 동시에 전문 자격증을 부분적으로 취득하는 상상을 하곤합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제가 바래왔던건 앞서 언급한 전문성보다도, 사람들로부터 대단하다고, 고생했다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더욱 컸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상상하는 지위만큼이나 저는 타인의 기대에 의존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사르트르에 따르면 내가 그토록 그려오던 이상적인 지위를 손에 넣는다고 할지라도, 타인이 나를 원하는 대로 바라봐주진 않을 것 같습니다. 당장 생각해봐도 짬내서 자기계발을 열심히 했다는 반응보다는 “꿀빨았다”, “군생활 대충했다”는 등의 시선이 먼저 그려집니다. 나의 동료가 생기는 만큼 적은 불어나며, 나의 세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타인의 시선에 즉자존재로 귀속될 뿐입니다. 그게 제가 인스타를 그만둔 까닭입니다. 맹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객체화로부터 좀 자유롭고 싶었고, 이 플랫폼을 통해서는 내가 원치 않는 사람들로부터 시선과 평가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했습니다. 간을 배 밖에 내놓는 불안감이라고나 할까요. 대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감사하고, 그 안에서의 반응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 받을 필요는 없는겁니다.
정리해서, 저는 두 가지 결론을 도출합니다. 우리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진게 노력말고는 없기 때문에 노력해야 합니다. 그 결과로서 얻어지는 이상적인 지위는 완전무결해보이지만, 사실 타인의 시선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의 객체화를 극복하기 위한 제각각의 투쟁이 필요합니다. 저는 한동안 현대사회에서 객체화의 주요 수단으로 기능하는 플랫폼을 봉쇄하고, 인정욕구를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앞서 제시한 세 가지 물음에 답했습니다. 이것의 인정이 곧 반항의 시작점입니다. 반항은 주어진 상황에서 나에게 떳떳한 행동을 이어나가겠다는 의지와 같습니다.
이따금씩 철학적인 감성의 사유가 당연하고, 때로는 부질없게 여겨지는건 그럼에도 결국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일겁니다. 본고도 어떻게 보면 ‘열심히 살자’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테고, 실제로 이렇게 당연한 교훈으로 글을 쓸 시간에 한 문제라도 더 풀어보는 데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 대다수일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결과가 동일할지라도, 일단 계속 공을 던져보고는 들어갔을 때 기뻐하는 것만큼이나, 공의 궤적을 치밀하게 고민해보고는 비로소 실천하기까지에 이르는 과정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건 삶과 죽음 사이의 과정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만이니까요. 부조리한 상황이라고 해서, 안하는걸 못하는거라고 합리화하며 자기기만의 늪에 빠져드는 일은 이제 없을겁니다.이제야 카뮈가 말한 반항, 자유, 열정이 희미하게나마 그려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