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부터 나는 유독 옛날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방과 후에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할머니집에 가면 대청마루 안쪽에 앉은 할머니는 늘 앉은뱅이 재봉틀을 돌리시곤 했다. '덜거덕' 거리는 재봉틀 특유의 소리와 낡은 부품이 부딪치며 내는 ‘끼익’ 거리는 잡음과 재봉틀 바늘이 옷감을 누비며 꿰매지는 '드르륵드르륵' 소리가 내게는 할머니 목소리처럼 정겨웠다.
외손자를 보면,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부엌에서 콩국수나 김치를 넣은 국수를 삶아 내오셨다. 나는 국수를 먹는 동안 학교에서 있던 일들을 할머니에게 신나게 얘기했다. 재봉틀을 돌리는 할머니가 듣고 계신지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적당한 간격으로 “그래, 그래, 이런, 이런!” 하시는 말로 내 이야기를 이여 가게 하셨다. 밥상을 물리고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마당의 벚나무에서 매미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할머니의 재봉틀 소리가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고 돌 즈음에 나는 낮잠이 쏟아지곤 했다.
이때면 나는 할머니에게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할머니는, “옛날 얘기 좋아하면 가난해져요. 옛날 얘기는 왜 이리 좋아하누. 내가 아는 얘기는 다 했는데 무슨 얘기를 할까?”라고 하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기름장수 청년이 마을을 괴롭히는 호랑이를 잡는 얘기를 해줄게, 청년이 길에서 주운 강아지에 기름을 잔뜩 발라 미끄럽게 만든 뒤에 끈으로 나무에 묶어 호랑이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지. 호랑이가 강아지를 삼키면, 기름 때문에 항문으로 미끄러져 빠져나왔지. 이렇게 호랑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대청마루의 까슬까슬한 촉감을 손바닥으로 느끼고, 귀속에 드르륵 거리며 아련하게 멀어지는 재봉틀 소리를 듣다 보면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건너가 있었고, 그렇게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할머니의 옛날 얘기는 대여섯 가지뿐이었다. 늘 같은 얘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이야기의 즐거움이 채워지는 순간과 현실에서 아련하게 멀어지는 순간이 겹치면서 나는 아득한 다른 세상의 공간에서 잠이 들곤 했다. 그것은 1970년대 척박한 시절을 살던 내가 현실과 꿈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다가 현실에서 아찔하게 벗어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가 사라진 슬픔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할머니가 열어준 미지의 공간에 대한 나의 호기심의 문이 닫치고, 송두리째 무너진 상실감이었다.
나는 여전히 이야기를 좋아했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내향적인 나는 사람들에게 선 뜻 다가서기 어려웠지만,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더 커져만 갔다. 난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일기 쓰기를 통해서 나는 할머니가 열어줬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는 연습을 해나갔다.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의 욕망에다 사춘기에 호기심을 더 세심하고 정교하게 꾸며서 내 일기장에 적어 나갔다. 나는, 나만의 세계를 열쇠로 잠그고 또 책상에도 열쇠를 달았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러면서도 열망했던 세계에 대해,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의 가슴에 분수처럼 쏟아지는 이성에 대한 묘하고 다소 불순한 감정을 적었다. 나 홀로 늦은 밤에 일기장에 적어내는 짜릿한 즐거움은 할머니의 이야기가 채워줬던 호기심의 공간을 다시 채웠고, 나는 행복감에 젖어서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일기가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란 것에 공감한다. 아무에게도 공개할 수 없는 나의 내밀한 세계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현실은, 국가적으로 어른부터 초등학생까지 모든 것이 규율과 통제로 단단히 맞물려 있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매주 월요일이면 애국조회를 했고, 국기하강식을 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되뇌어야 했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서 시험을 보기도 했을 뿐 아니라, 재식훈련을 받고 살았다. 모든 것이 현실적 규율과 지시와 억압의 시대에서 살면서 정신마저도 철저히 규격화된 틀 속에 갇혀서 질식할 것만 같은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자유를 누리게 해 준 분이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내가 선택한 것은 ‘이야기 듣기’에서 ‘스스로 이야기하기'로의 전환이었다. ‘일기장’을 통한 나의 이야기하기는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나 나만의 공간에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였다. 나는 이곳에서 누구의 지시도 통제도 받지 않았다. 하루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면, 나의 호기심이 충족되고, 행복해졌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시 한번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실현한 공간은 군대였다. 1980년대는 여전히 엄혹한 군사독재 정권의 시대였다.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한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사회였고, 그 시절의 군생활은 여전히 모질었다. 졸병 시절, 하루 걸러 한 번씩 이유 없는 ‘집합’이 걸렸고, 긴 훈시 끝에 집단 '얼차려'와 매질을 당해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나는 입대를 하면서부터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얼차려를 받은 날 밤이나, 심야에 홀로 야간 보초를 설 때나, 점호가 끝나고 나면 모포 속에서 일기 쓰기를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이미 나만의 해방 공간의 비법을 터득했다. 군생활을 넉넉히 이겨낼 만한 짜릿한 긴장인, 일기 쓰기의 즐거움을 누리며 그 시절을 보냈다.
아쉬운 것은, 내 인생에서 말하고 싶은 이야기의 욕망을 기록했던 그 시절의 일기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여러번의 이사와 분주한 삶을 지나오면서 내 소중한 기록들을 많이 잃어 안타까웠다.
그렇게 바삐 살아가다가 2000년 초반에 한국을 떠나 해외에 살게 되었다. 삶의 기록들을 남기고 싶을 때, 새롭게 찾은 기록 매체가 싸이월드였다. 10년 넘게 해외 생활을 하면서 나는 나의 삶과 가족의 삶의 자취들을 사진과 함께 열심히 기록에 남겼다. 과거의 기록이, 나만이 몰래 간직한 금기에 대한 야릇한 표현 욕구의 충족이었다면, 싸이월드의 기록은 누가 봐도 좋을 만한 가족 야유회 앨범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싸이월드의 서비스 중단 시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나는 10여 년의 기록의 대부분을 고스란히 잃어야만 했다. 그 많은 기록들이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안타까움을 다시 한번 겪어야만 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현실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정신없이 바빴다. 10년 넘게 떠나 있던 동안 한국은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몇 년간 현실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난 후에야 나는 내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제 황혼기에 접어든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브런치’라는 콘텐츠 퍼블리싱 플랫폼을 발견했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내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편으로는 글의 홍수 속에 쓰레기 한 무더기를 투척하는 것은 아닐까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책꽂이 한쪽에서 발견한 낡은 일기장을 읽다가 추억의 순간들이 암실에서 인화된 흑백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옛 추억의 그림자들이 생명을 얻고, 내 젊음의 순간들이 하나씩 실루엣 그려냈다. 더 지나치면 잊혀갈 것 같은 기억들을 용기를 내서 쓰기로 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순례자라고 생각한다. 한국을 떠나 10여 년을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내가, 천상병 시인의 <귀천>처럼, 하나님이 부르시면 본향으로 돌아 가면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브런치’의 작가가 돼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고맙게도 단 한 번에 작가로 통과됐다. 그날이 2024년 8월 15일이다. 첫 번째 글을 올리던 날의 기대와 설렘이 지금도 기억난다. 첫 글을 올리고 나서 반나절이 지나서야 조심스럽게 브런치 앱을 열어 보았다. 놀랍게도 많은 브런치 작가들이 하트를 날려 줬고, 여러분들이 댓글로 나의 첫출발을 격려해 줬다. 그중에 '고은로 ***' 작가님이나 '꽃보다 예쁜**' 등의 몇 분 작가님은 내가 쓴 글마다 방문하셔서 격려할 거리를 일부러 찾아 힘을 내서 계속 글을 쓸 수 있도록 동력이 돼 주셨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처음에 구독 숫자가 10에서 50으로, 100에서 200백, 300백으로 늘다가 1,000이 되고, 일 년 조금 넘은 지금은 1,600을 넘어섰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작가님들의 너그러운 배려의 풍토 덕분인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지금도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글쓰기를 천직으로 알고 쓰는 진짜 '작가님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처음에도 그랬듯 여전히 수습작가의 마음으로 글을 쓴다. 글쓰기의 기쁨이 내 안에 충만하면 족하다는 첫 마음으로 계속 글을 써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는 많은 '브런치 작가들'을 격려하고 칭찬하며 함께 글을 써나갈 것이다.
지금은 '브런치' 덕분에 내가 말하고 싶은 욕망의 공간을 하루하루 호기심에 차서 열어가고 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위로를 얻고 행복감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되었다. 나 아닌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내 글이 열어 논 공간에서 호기심과 행복감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언젠가 '작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될 날을 기대하며 글을 써나가는 것이 나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