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네 South Central Vietnam - Mui Ne
베트남 달랏에서 무이네(Mũi Né)로 이동을 하는 날이다. 고생길과 같았던 냐짱과 달랏을 거쳐 무이네로 향한다. 남은 여정은 무이네를 거쳐 사이공으로 넘어가면 끝이 난다. 돌아갈 날이 정확히 반이 남은 상황, 무이네는 브레이크 포인트였다.
반짝거리는 최신식 LED 조명 간판으로 교체되기 전까지 가게들은 예나 지금이나 한 자리를 지키며 영업을 해오고 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옛 가게들, 이름도 간판의 메뉴도 보이지 않지만 현지인들은 알아서 잘 찾아온다. 구글 맵도 별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한적한 시골을 벗어나 버스는 뒤뚱거리는 오리처럼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넘어 6시간이 넘게 걸려 무이네에 도착했다. 바람의 도시답게 바람이 강하게 분다. 무이네에서 지내게 될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나니, 저녁 8시가 다 되어버렸다. 전날까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슬리핑버스를 타는 게 다소 무리 다 싶었지만 어찌어찌 도착했다. 해산물이 유명한 무이네지만 긴 이동시간에 지쳐, 저녁은 숙소 인근 한식당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한 달 살기가 유행하기 전, 과거에는 한 곳에 머물면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전역을 돌아보며 전투식으로 여행을 하던 때가 있었다. 한 나라도 모자라 유럽이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한 번에 돌던 때. 동배, 유랑, 아쿠아, 발리서프 등의 커뮤니티가 인기가 있을 무렵. 여행 중 예기치 못한 위기를 이겨내고 몸도, 마음도 지칠 무렵 찾게 되는 한식당의 한식은 정말 값비싼 영양제보다 비상약보다 더 빠른 효과를 내기도 했다. 아마도 무이네에 한식당이 그런 기분이었다. 여행지에 한식당이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맛있는 한 끼를 해결할 수도 있고 위급 상황에는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렇다.
잠들기 전 핫팩을 준비하던 던 달랏과는 달리 저녁인데도 체감온도가 23도가 넘어가고 있다. 따뜻한 김치찌개까지 먹고 나서 그런지 온몸에 온기가... 심지어는 땀까지 흐르기 시작한다. 조심스레 무이네의 낮 기온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나면 금방 깜깜해지는 무이네다. 일단 씻고 누워 내일을 준비.
잘 익은 수박과 청설모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아침 조식을 즐겼다. 달랏이 베트남 현지인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명소라 한다면, 무이네는 오래전부터 서양여행자들의 천국이다. 이들은 아마도 수 십여 년 전 베트남과 인연을 맺고 신문물이라 불리던 슬리핑버스에 몸을 싣고 젊음을 드라이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그들이 가장 좋아하고 편안해하는 곳으로 다시 찾아드는 노련한 여행자들이다. 연륜과 경험은 그 어떤 지식보다 정확할지 모른다. 적어도 여행에 대해서는 말이다. 물론 새로운 도전은 없지만 나름의 행복이 있다. 어쩌면 무이네는 이런 노인들의 안식처이자 보금자리가 아닐까. 노년에 머물고 싶어 하는 그런 곳. 나 역시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무이네 역시 처음이 아니기에 나름의 경험치로 선택한 숙소다. 2층에 마련된 조식당보다 높게 자란 나무를 타고 청설모는 더도 덜도 아닌 4~5알의 열매를 재빨리 따먹고 사라졌다. 나도 수박 5조각으로 아침을 재빨리 마무리하고 나왔다.
무이네를 찾을 때마다 발리의 사누르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머무는 호앙 응옥 비치 리조트도 그렇지만 씨홀스 리조트는 분위기가 매우 비슷하다. 하루종일 리조트에서 이들의 말벗이 되어줄 수도 있지만 나는 나대로의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는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조금 늦은 시간에 아침을 마쳤기에 리조트 풀장의 선베드는 모두 그랜드 파파와 마마들에게 빼앗겼다. 적어도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는 저 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단은 풀장 안으로 들어가서 더위를 식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공감대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여행의 베테랑들이 쏟아내는 여행기를 듣고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무이네에서 나는 사막투어를 다녀올 계획이다. 얼마나 많은 페이지를 할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장, 단점 비교와 정확한 정보 전달을 위해 일출 투어와 일몰 투어 모두를 다녀올 생각이다. 일출 투어는 새벽 4시, 일몰 투어는 오후 2시에 시작된다. 숙소는 베이스캠프다.
일출 투어. 피곤하긴 하지만 빨리 시작하면 빨리 끝날 수 있다. 아직 깜깜하기만 한 새벽, 찬 바람에 깜짝 놀라 달랏에서 입었던 경량 패딩을 챙겨 나왔다. 출발 시간보다 훨씬 전에 도착한 드라이버. 부지런하기도 하다. 과연 잠은 자고 나온 것인지, 새벽을 샌 것인지 궁금하지만 일단 출발. 그 사이 새로운 포토 존이 생겨난 모양이다. 살짝 덜 깬 상태로 비포장 도로를 조금 더 달려 도착한 화이트 샌듄. 한 무리의 여행자들과 함께 정상에 올라 해가 떠 오르기를 기다려본다. 서서히 떠오르던 해가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일출을 보고 각자의 방법으로 화이트 샌듄을 즐겼다. 다른 여행자들보다 조금 빠르게 복귀하여 지프에 올라 잠시 휴식.
일출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니 오전 9시가 조금 넘었다. 아직 조식당은 투숙객들도 분주하다. 재빨리 조식을 먹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야외 풀로 들어왔다. 데자뷔처럼 어제와 똑같은 사람들, 심지어는 자리까지 똑같다. 서양 할아버지, 할머니가 선베드에서 오늘도 어제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은 조금 더 친해졌다. 한국 날씨가 어떤지, 오늘이 며칠인지, 무이네 있다 보니 글세 까먹고 만다.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고, 마땅히 할 일도 없기에 바닷가 나무 그늘아래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베트남에 와서 가장 여유롭고 느긋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듯하다. 덕분에 피부도 다시 까맣게 변해만 간다.
점심을 먹고 나서 일몰 투어에 참여했다. 오후 2시에 시작된 투어, 똑같은 장소를 두 번씩 방문하는 결코 재미나지 않는 일. 그러나 일이다. 머릿속에 명령어를 입력하고 행동하면 된다. 화이트 샌듄에서 새벽 일출 투어를 함께 했던 드라이버를 다시 만났다. 어리둥절한 표정, 그래도 몇 시간 함께 동고동락을 해서인지, 생수 한 병을 건네주며 인사를 건넨다. 레드 샌듄이라는 이름처럼 해넘이가 시작되자 붉게 변해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동일한 두 번의 투어를 통해 전체적인 스케줄과 일정, 도움이 될만한 팁과 사진까지 정리해서 원고를 썼지만 최종 인쇄본에는 2p로 허무하게 끝났다. 최신 개정판에도 반영은 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무이네의 리조트는 호앙 응옥(Hoang Ngoc)이라는 이름의 리조트다. 개인마다 리조트 선택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비치프런트 타입의 리조트는 야자수가 가능한 많이 심어져 있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연식이 조금 된 곳을 선호한다. 나무도 자라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시설이 좋은 최신 리조트들은 어느 정도 시행착오의 시간이 필요한데 반해 오랜 터줏대감 같은 곳들은 오랜 경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다. 무엇보다 야자수도 높아 자연스레 그늘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좋다. 호앙 응옥 리조트는 가격으로 따지면 그리 비싼 곳도 아니고 블로그나 인터넷에서 추천하는 그런 곳도 아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부터 열심히 가든을 관리하는 정원사들, 어떤 일도 해결해 줄 것 같은 친절한 로비 데스크 직원들까지 불편함이 없다. 무엇보다 멋진 해넘이를 전용 비치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엔 2박 정도 머물 예정이었지만 2박은 5박으로 연장이 되었다. 재미난 광경을 목격한 것은 마지막 5박째가 되는 날이었다. 이날도 어김없이 조식과 풀에서 시간을 보냈다. 3일이 넘어가면서 리조트 내 투숙객들과도 많이 친해져서 하루 일과를 공유할 정도가 되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중, 건장한 남성 직원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각종 장비들도 등장했다. 가장 먼저 선베드에 깔려있던 낡고 낡은 패드들을 컬러풀한 새것으로 교체를 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빛바랜 누런 색 파라솔도 패드와 같은 컬러로 바꾸고 있었다. 순식간에 새로운 풀장 분위기로 변신했다.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면 할머니가 살짝 귀띔을 해준다. 주말 준비 중이라고. 주말이면 베트남 현지 여행자들이 단체 관광을 오는데 마치 새 리조트처럼 변신을 한다는 것이다. 저녁 신나게 노래도 부를 수 있도록 노래방 기계도 세팅을 하고. 지난주에도 난리였다고 말이다. 유난히도 낡아 보이던 선베드와 파라솔은 주중 용이이었다는 사실이 조금 웃겼다. 좋은 의도에서 참으로 베트남스러웠다. 다행인 건 나는 더 이상 연장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5일 간 정들었던 리조트를 떠나 사이공으로 향하기로 했다. 일주일 중 5일은 무이네에서 지내고 주말은 사이공에서 머물다 다시 월요일이 되면 무이네로 돌아올 것이다. 짧은 시간 정든 리조트를 떠나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다시 돌아올 것이기에 간단히 작별 인사를 하고 체크아웃을 했다.
사이공에서 주말을 보내고 다시 돌아온 무이네. 보통의 여행에서는 상상할 수 없지만 취재를 할 때는 다양한 변수들이 있기 마련이다. 사이공(호찌민, 호치민)에서의 주말. 이른 아침 나의 단잠을 깨운 건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파도소리도 아닌 시끄러운 공사 소음이었다. 베트남의 부지런한 국민성은 공사장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호텔 예약 사이트를 통해 숙소를 예약하는지라 바로 옆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일과가 끝나는 오후까지 멈춤 없이 진행되는 공사 소음과 차량 경적, 사람들의 고함소리. 변화가 일상인 베트남의 사이공이다.
독박이라도 쓴 기분으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무이네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슬리핑 버스로 갈아타고 두어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야자수와 바람이 부는 무이네에 도착했다. 다시 시작된 이상한 루틴, 한식당에 들러 한식을 먹고 이번엔 또 다른 리조트로 체크인을 했다. 마치 지중해에 머물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최신 리조트. 붐비고 정신없던 주말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평온한 한 주. 무이네 바다를 다시 마주하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진다.
무이네의 이동수단은 바이크다. 복잡한 사이공에서는 무리지만 무이네에서는 스트레스 없이 바이크를 탈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바이크를 타고 선셋 포인트를 찾아왔다. 달랏에서 무이네로 올 때 버스에서 만났던 친구가 알려준 곳이다. 몇 자리 안 되지만 서양 여행자들이 해넘이를 감상하기 좋은 자리에 이미 앉아 자리를 잡았다. 마땅한 자리가 없어 고민하던 차, 바 직원이 메뉴판을 건넨다. 주문을 하기 전 자리가 없다고 말하자 야자수 옆 창고에서 빈백을 무대 중앙으로 끌고 나왔다. 조금 부담스러워 야자수 옆으로 옮겨 앉았다.
해바라기처럼 뜨거운 땡볕아래서 태양과의 힘든 사투를 벌인 결과, 가장 좋은 자리에서 선셋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힘겹게 잡은 자리지만 누군가 다가와 나의 시야를 막고 사진을 찍고 있으려 하니, 매너 좋은 저들도 하이킥이 나올 판이다. 한두 명이 깨버린 법칙이 무질서를 만든다.
본격적인 해넘이 시간이 되자 어디선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는 사람들. 오늘은 여기 모인 50여 명의 이방인들과 함께 아름다운 해넘이 쇼를 관람하게 될 것이다. 마치 양화관에 온 것처럼 맥주, 칵테일, 코코넛, 생수 등 함께 하기 좋은 음료를 주문하고 차분히 쇼를 기다린다. 비트감 있는 음악이 해변에 퍼지면서 조금씩 뜨거웠던 태양도 식어간다. 조금씩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주연 배우는 단 한 명, 그저 천천히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연기에 모두가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5:45분 영화가 시작되었고 20분 남짓한 상영 시간을 끝으로 영화는 금세 막을 내렸다. 무이네의 하루도 그렇게 저물어 갔다. 특별한 스토리가 없어도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들. 무이네의 일주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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