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인터뷰] 골키퍼 김병지

2019년 1월 인터뷰 - 레전드매거진 게재

[취재/글: 이준동]

[사진: 이준동] 


K리그 통산 최다 출전 (706경기),  K리그 통산 최다 무실점 (229경기), K리그 통산 최다 연속 무교체 출전 (153경기), K리그 최고령 출전 (45세 5개월), K리그 통산 골키퍼 최다 득점 (3득점), K리그 올스타전 역대 최다 연속 출장 (1995~2007 총 16회).


'골 넣는 골키퍼' 김병지가 현역시절 이뤄낸 기록들이다. '내 뒤에 공은 없다'라는 일념으로 대한민국 전설의 골키퍼가 된 김병지를 만나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일대기를 허심탄회하게 들어봤다. 


김병지 선수 [사진=이준동]


[내 뒤에 공은 없다, 김병지]

안녕하세요. 축구선수 김병지입니다. 이렇게 저를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현역을 은퇴하고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는 제가 감히 축구에 대한 저의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쑥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저의 이야기가 미래 대한민국 축구를 이끌어갈 어린 선수들에게 힘이 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에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간 제가 축구와 함께 살아온 지난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축구와의 인연은 참 단순했습니다. 축구는 저에게 그저 하나의 놀이에 불과했습니다. 재미난 놀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죠. 그저 놀이라 생각했으니 제가 축구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또 축구에 관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하지만 축구에 필요한 한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었죠.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저는 전교에서 가장 달리기가 빠른 아이였습니다. 당시 재학 중이던 밀양초등학교에서 축구와 육상 두 가지를 집중 육성했는데 달리기가 빠른 저는 당연히 육상을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학교에서 축구부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인 후원과 축구 인재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축구부에 들어가 그렇게 축구와의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축구부 분위기는 엄격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축구는 저에게 하나의 ‘놀이’에 불과했습니다. 그저 신나게 공과 함께 놀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축구부에서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체벌을 받기 일쑤였죠. 놀이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체벌을 받으니 당연히 축구가 재미도 없어지고 흥미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다가 어느 날 문득 ‘진짜 축구를 한번 해보자’라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해 대학 축구팀 대신 직장 축구팀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죠. 사실 제가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당시 이미 축구선수로서는 포기를 해야 할 위치였습니다. 학창 시절 이렇다 할 축구 이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고, 대학 진학을 못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직장 축구팀에 입단을 했으니 프로 축구선수를 꿈꾸기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놓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축구 하나만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직장 축구단, 군시절 상무 축구단을 거쳐 23살 나이에 드디어 ‘울산 현대 축구단’에 입단하며 본격적인 프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2년 뒤 저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었고 통산 706 경기 출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마흔여섯에 은퇴하기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김병지 선수 [사진=이준동]


[골키퍼 김병지]

많은 분들께서 아직 기억해 주시겠지만 제 별명이 공격하는 골키퍼였어요. 김병지라는 이름을 들으면 ‘헤딩 골 넣은 골키퍼’로 기억한다는 분들이 아직도 많이 계십니다. (웃음) 하지만 저의 무리한 드리블로 인해 2002년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정말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그런 힘든 시기가 있었기에 제가 그 후로 14년이라는 시간을 더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좌절과 고통의 시간이 바로 마흔여섯까지 축구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죠.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직장 축구단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황을 시작할 때 이미 축구선수로서의 환경이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20대 초반이니까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0대 초반부터 10년간은 저에게는 축구인생의  상승기였습니다. 젊고 체력도 받쳐주고, 무엇이든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정신력도 갖췄었죠. 


그런데 서른두 살 즈음부터 정말 급격히 모든 게 힘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분들이 생체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나이잖아요.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이 시기를 어떻게 버텨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고 한 가지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체력을 상향시키는 것은 무리일 수 있지만 현재 체력을 최대한 유지하도록 노력을 해보자였죠.


답을 찾고 나서 바로 술과 담배를 끊었습니다. 체중조절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그렇게 14년을 보냈습니다. 20대 초반부터 10년간은 상향, 그 후 은퇴까지 14년은 하강하지 않도록 ‘유지’하는 데에 전력을 쏟았습니다. 이 전략이 아니었으면 저는 진작 은퇴했겠죠.


지금이야 이렇게 쉽게 얘기하지만 사실 습관을 바꾼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담배야 자기 절제로 끊는다고 해도 술은 쉽지가 않더라고요. 거의 매일 친구를 만나거나 선배 후배를 만나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 꽃을 피우는데 술이 빠질 수 없잖아요. (웃음)


그래서 아예 밤 8시 이후로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친구들이나 선후배 모두 술 안 마시는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서운해했죠. 저의 금주를 남들에게 이해시키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굴 만나 술자리를 가져도 제가 사이다나 커피를 마시는 게 이상하지 않은 풍경이 됐습니다. 



[꽁병지 TV]

제가 92년도에 꽁지머리 했었잖아요? 그 당시는 젊은 남자가 노란색으로 염색을 하는 건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났던 시절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공중파와는 다르게 나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유튜브라는 플랫폼이 참 매력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꽁병지 TV’는 한마디로 ‘축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30년 이상을 축구를 하며 몸과 마음에 새겨진 전문성을 다른 분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취지로 시작했습니다.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이 전문적인 지식과 견해를 어떻게 일반 팬들에게 쉽고 편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입니다.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예능프로’ 스타일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축구 이야기를 녹여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데 꾸준히 노력하며 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2019년도 꽁병지 TV의 목표는 구독자수 50만 달성입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전까지 80만에서 100만 구독자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유튜브의 효용성을 길게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꽁병지 TV 유튜브 채널도 길어봐야 5년 정도라 생각하고 있구요. 하지만 이 유튜브 채널을 통해 맺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기반이 구축된다면 유튜브를 능가하는 새로운 플랫폼이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이 관계가 우리를 지탱해 줄 거라 믿습니다.


김병지 선수와 부인 김수연 선생님 [사진=이준동]


[김병지, 그리고 가족]

저의 아내는 섬유디자인을 전공해 꾸준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개인전도 열었죠. 제가 현역시절에는 저를 내조하느라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시간이 부족했는데 제가 은퇴하고 나서는 아내 본인의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개인전을 비롯해 많은 미완성 작품들이 사실은 저를 미뤄놨던 일들이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저를 위해 아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했던 거죠.


그리고 아들이  셋 있습니다. 큰 애가 올해 스물일곱, 둘째가 열일곱, 셋째가 열셋이에요. (2019년 기준) 

저는 가능하면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왔구요. 서로의 관심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공유합니다. 첫째는 스포츠 비즈니스 마케팅 분야 공부를 하고 있고, 둘째는 드럼 세션과 작곡 공부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작하는 일에 남다른 손재주가 있어 학교 공부와는 별개로 조각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축구선수로 키워낼 계획이 있냐고 주변에서 많이들 물어보십니다. 제가 하나의 ‘놀이’로 축구를 시작한 이유는 마냥 재미있고 즐겁고 축구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억지로 축구를 하라고 강요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라 확신합니다. 아이들도 가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그 꿈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꿈을 찾아 제 인생을 그려왔고, 아이들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이들에게 꼭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사기당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우리 애들만은 사기를 당하면 안 되는데’라는 막연한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친구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세상을 보는 지혜’를 강조합니다. 아이들에게 교우 관계를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사실 예전에 우리 아이 학교폭력 구설수로 힘들었어요. 유명한 사람의 자녀다 보니 진위 여부를 떠나 빠르게 이슈가 퍼 나르고자 하는 소수 기자분들의 실수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나 저의 가족에게는 그 대미지가 상당히 크게 다가옵니다.


이들은 진실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김병지의 아들’이 이러이러했다더라 하면 그들의 할 일은 끝납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저와 제 가족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주인공이 되기만을 원합니다. 물가에 낚싯대를 던져놓고 하염없이 물고기가 물기만을 기다리듯이 ‘내가 쓴 글이 사실이었다’를 제가 확 물기만을 손꼽아 기다리죠.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겠다던 언론도 어느새 이슈가 터지기만을 기다리는 낚시꾼이 되어가는 모습에 많이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저 스스로 진실을 밝히는 데에 3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밝혀낸 진실인데 이 진실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저를 향했던 낚싯대를 거둬 다른 곳에 던져 놓은 듯했습니다. 이미 더 이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사실 둘째는 어릴 때 축구선수를 꿈꾸었는데 둘째 SNS에 온갖 악성 댓글이 달려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축구를 그만두고 음악을 하겠다고 진로를 변경했습니다.


저희가 잘못한 부분은 끝까지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사죄했고, 진실이 아닌 부분까지 왜곡시킨 것에 대해서는 상대방도 그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유명인 아버지 때문에 아이들이 피해를 입은 것이라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에는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그 누구도 관심 없는 진실이었지만 저희 가족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진실’이었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진실을 겪은 아이들이기에 ‘사기당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 이야기를 하니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네요.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앞으로가 더 중요하겠죠. 저는 지금 운영 중인 ‘꽁병지 TV’를 필두로 다양한 분야의 비즈니스에 도전하려 합니다. 최종의 목표는 ‘김병지 축구클럽’의 구단주가 되는 것인데요 (웃음). 이런 저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그 퍼즐을 맞춰가고 있는 단계입니다. 소소한 일들이 하나로 모여 큰 성과를 이뤄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 뒤에 공은 없다’라는 초심을 잃지 않고 앞만 바라보는 골키퍼 정신으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펼쳐내겠습니다. 저를 기억해 주시는 많은 여러분들의 응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인터뷰] 드래곤볼 각본가, Koyama Takao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