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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피아니스트 임현정

2019년 5월 인터뷰 / 레전드매거진 게재

[취재/글: 이준동]

[사진: 임현정 제공]


임현정은 세 살 때 음악을 시작해 열두 살 되던 해 프랑스 ‘콤피엔느 음악원’에 입학. 5개월 만에 수석 졸업 후 15세 나이로 ‘파리 루앙 국립음악원’ 최연소 조기 졸업 기록을 세웠다. 2003년 입학한 프랑스 최고 음악학교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 역시 2006년 최연소로 수석 졸업한다.


2009년 유튜브에 올린 림스키 코르사코프 ‘왕벌의 비행’ 연주 영상이 조회수 82만 여 건(2019년 기준)을 기록하며 그녀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이를 계기로 2012년 영국 EMI와 계약을 맺고 베토벤 피아노 소타나 전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이 음반으로 ‘빌보드 클래식 차트’와 ‘아이튠즈 클래식 차트’ 모두 1위를 석권하며 명실상부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 자리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린 피아니스트 임현정을 만나 피아노와 함께 살아온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어봤다.



[피아니스트 임현정]


안녕하세요. 한국내 매체를 통해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어 너무나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스위스에 거주하며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임현정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실 저희 부모님께서는 전혀 음악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오셨고, 저희 집안에 음악가는 단 한 명도 없는 그런 평범한 가정이었어요. 그렇기에 제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자체가 혁명적인 일이었죠. (웃음) 제 어린 시절에는 그냥 동네 피아노 학원 다니는 게 유행이었어요. 저희 어머니도 사촌언니가 “아니, 왜 애를 유치원에도 안 보내고 계속 집안에만 있게 하냐? 요즘 피아노 배우는 게 유행인데 피아노를 배우면 양쪽 두뇌를 다 사용하게 되니 도움이 될 거야. 한번 보내봐라”라고 얘기하는 걸 듣고 저를 피아노 학원에 그냥 보내셨던 거예요.


그렇게 시작한 피아노를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배웠어요. 그때 프랑스에는 수많은 유명 음악가와 연주가를 배출한 ‘파리 국립음악원’이라는 전설적인 음악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제 나이 만으로 12살 되었을 때 저는 ‘그 학교에 가고 싶다’라는 꿈이 생기게 되었죠.


이 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전문 교육기관이었지만 국내에서는 생소한 학교였어요. 저는 프랑스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니께 먼저 말씀을 드렸어요. 사실 어머니 깨 엄청 혼날 각오를 하고 조심스레 얘기를 드렸는데 어머니는 의외의 반응이셨어요.


어머니가 저를 가질 때 태몽을 꾸셨는데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떨치는 그런 꿈을 꾸셨다 하시면서 ‘이런 기회를 만들려 그런 꿈을 꾸었나 보다’ 하시더라고요. 어머니의 무한한 신뢰를 느끼며 저는 힘을 얻어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죠.


역시 아버지는 결사반대였습니다. 아버지는 “12살짜리 여자 아이가 어떻게 혼자 프랑스라는 먼 나라에 가서 혼자 살아갈 생각을 했냐”며 저를 꾸짖으셨어요. 그때부터 저는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며 무언의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웃음) 제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조르고 조르며 투정과 투쟁을 벌이다 보니 아버지도 결국 저의 꿈을 이해해주시고 프랑스 유학을 허락해 주셨어요. 그렇게 저는 꿈에 그리던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임현정, 프랑스]


프랑스에 도착해 바로 학교에 입학하지는 못했고 한국인 가족의 집에서 6개월 정도 홈스테이를 하며 학교 입학을 준비했어요. 그때 개인 교습 형식으로 음악 수업을 받았는데 저를 가르쳤던 교수님은 국립음악원을 정년퇴직하신 할머니 교수님이셨어요. 그분은 프랑스 국립음악원 역사에 남을만한 유명한 교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이 할머니는 정말 음악 이론의 천재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너무 완벽하셨고 너무 많은 걸 알고 계신 분이란 걸 직감했죠.


본인께서 그렇게 완벽하다 보니 제가 뭔가를 모르는 걸 용납을 못하셨어요. 음악을 가르칠 때만큼은 어마어마하게 무서우셨죠. 그분 수업에 들어가면 남가 전 여자건 나이가 많건 적건 누구든지 한 번은 꼭 눈물을 흘렸어요. 그럴 정도로 굉장히 독하시고 너무나 철저하신 선생님 밑에서 제가 이론 교육을 받고 저는 당당히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그 헐게 부푼 기대를 안고 학교 생활을 시작한 저는 오래가지 않아 수업이 시시하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할머니 때문이었어요. (웃음) 정말 거짓말 안 하고 할머니가 저에게 너무 많은 이론과 지식을 가르쳐주셔서 학교 수업이 재미없던 것이었죠. 저는 그 할머님으로부터 이미 너무나 많은 걸 배웠다는 것에 감사해 알고 나서 밤새 운 적도 있어요. 너무나 감사한 마음뿐이었죠.


그 할머니 교수님이 돌아가실 때 곁에 있어드리지 못한 것도 아직까지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뭔가 너무나 잘할 때면 살짝 미소를 보내주셨어요. 그 미소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운 분이십니다. 제 기억으로는 딱 한번 저를 칭찬해주셨는데 곡을 해석하는 숙제를 해서 제출하자 할머니 교수님이 많은 학생들 앞에서 “야! 한국에서 온 외국 애도 이렇게 잘하는데 너네가 이러면 어떡하냐”며 “얘는 프랑스어도 공부하면서 음악까지 공부하면서도 이렇게 잘하는데 너희는 도대체 뭐 하는 거냐?”라며 저를 칭창 해 주시는데 저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의 철저한 교육으로 모든 내용을 이미 알게 된 저로서는 학과 수업이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딱 하나 ‘피아노’ 수업만은 너무 좋았어요. 아마 다른 이론 수업은 프랑스어로 진행되어 언어가 익숙지 않아 그럴 수도 있었을거구요. 제가 아예 유아기나 어린 나이에 갔으면 프랑스어를 빨리 배울 수 있었을 텐데 애매하게 중학생 나이에 가다 보니 언어의 장벽도 너무 높게 다가왔죠. 한국에서 배운 음표나 기호 같은 음악과 관련된 단어도 모두 프랑스어로 다시 익여야 하는 것도 곤욕이었죠.



[임현정, 벨기에]

제가 특히 피아노 수업을 좋아했던 또 다른 이유는 피아노 교수님과 그분의 레슨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저는 부전공으로 ‘지휘’를 했는데 지휘 수업도 저에겐 색다른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국립 음악원에서 학업을 마칠 때쯤 저는 ‘벨기에’에 있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1년에 한두 명 정도 뽑는 소수정예 인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고급 학교였죠. 중세 유럽 왕이 살법한 으리으리한 궁전이나 성 같은 느낌의 학교에는 다양한 음악 분야의 인재가 모여있는데, 입학하는 학생들에게는 모든 게 다 지원이 됐어요.


저는 정말 운이 좋았는지 피아노 연주 부문으로 그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아노의 경우 학생의 방 안에 그랜드 피아노를 놓아줄 정도였죠. 매일 방을 청소해주시는 분이 따로 계셨고, 학생들 이동을 위한 차량과 기사가 항시 준비되어 있었어요. 또 학생들 입맛에 따라 다양한 요리를 제공해주는 요리사분들도 계셨구요. 완전 공주 같은 삶이었어요.


그렇게 호화로운 학교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3개월도 채 안되어 저는 저 자신이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와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연주회나 공연도 대부분 벨기에 왕족들을 위한 연주를 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한 나라의 상류층을 위한 억압된 공연이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죠. 그래서 3개월 정도 학교에 있다가 자퇴를 했습니다.


거기를 나오니 주변에서는 다 저를 미쳤다 하더라구요. (웃음) 이 좋은 학교를 왜 제 발로 나가냐 의아해했죠. 저는 그 학교 안에 갇혀 있는 삶이 답답했고 또 연주할 수 있는 공연이나 곡들을 내가 선택할 수 없고 짜인 레퍼토리에 맞춰 연주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고 친구들에게 얘기했죠. 그래도 아직까지도 이해를 못해주는 친구가 있기는 하지만요.


[임현정, 왕벌의 비행]


그렇게 학교를 박차고 나와 저는 2008년도 공연 당시 찍은 영상 하나를 유튜브에 올렸어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이란 곡인데 속주곡으로 유명하며 연주자들이 앙코르 곡으로 많이 연주하는 곡이었습니다. 이 영상은 삽시간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한국까지 전해져 저의 존재를 처음으로 한국에 알리게 됩니다.


그때부터 갑자기 한국에서 연주할 기회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고, 매니지먼트 회사에서도 연락이 와 회사와 계약을 하고 음반도 발매하며 정식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소극장에서 열린 작은 연주회의 앙코르 연주 하나가 저를 이렇게 변화시킬 줄은 상상도 못 했죠. 사실 저는 그때 유튜브도 할 줄 몰라 아는 분이 ‘이제는 유튜브가 대세니 한번 해보라’하시며 직접 촬영해주시고 자신의 계정에 올렸던 영상이었어요,


당시까지만 해도 저는 연주회가 끝나면 집으로 전화해 부모님께 잘 마쳤다 인사를 드리는 정도였거든요. 이 유튜브는 제가 연주하는 영상을 부모님이 직접 보실 수 있으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연주회 때마다 영상으로 담아 부모님께 보여드렸어요.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시며 부모님 두 분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저도 눈물이 날만큼 기뻤어요.



[임현정, 가족]


그렇게 저를 응원해주시던 아버님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어머니는 아버님과 함께 계실 때보다 더 많이 저를 응원해주시고 계십니다. 저희 아버님은 옛날부터 심장이 좀 안 좋으셨는데 제가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회를 열 때면 사람들 앞에서 내 딸이라며 너무나 자랑스러워하셨어요. 그렇게 저를 자랑스러워하시던 아버님은 결국 지병으로 저희곁을 먼저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연주할 때마다 하늘나라에서 저를 응원해주시는 아버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모든 연주회를 완벽하게 하려 최선을 다하기도 하죠.


지금은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오면 연주회를 열고 방송이나 라디오에 출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스위스와 유럽 현지 학생들을 위한 강연도 많이 하려 하고 있구요. 저의 강연 주제는 “내가 어디서 왔다는 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지금 어떤 마음 상태이며 어디로 가는지가 더 중요하다”라는 걸 강조하죠. 그들에게는 외국인인 제가 프랑스어도 잘 못하며 음악을 공부해 피아노로 인정을 받으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저의 얘기를 전해줄 때면 많은 학생들이 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임현정, 음악]


제가 생각하는 ‘음악’의 정의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언어라 생각합니다. 러시아 사람, 중국사람, 또는 몽골사람 등 어떤 민족이라도 음악 하나만으로 서로 소통학도 교감할 수 있잖아요. 이렇게 음악은 언어와 종교, 그리고 국경을 뛰어넘는 언어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할 때 이 부분을 가장 강조합니다.


저의 강연은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보다는 저 개인의 삶을 바탕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더 많아서 그런지 그 어린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뜨고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때면 그 학생들에게 너무 감사함을 느낍니다. 저의 강연이 학생들의 삶에 긍정적 변화와 힘을 가져다주기만을 바랄 뿐이죠.



[임현정, 마지막 메시지]


저는 오는 7월에 다시 한국에 오는데요, 먼저 인천시향과의 현엽 공연이 있구요, 그리고 이번에도 출연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다시 출연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임현정과 함께하는 숲 속 피아노 캠프’입니다. 피아노 전공생들을 대상으로 저와 함께 4박 5일간 함께 하며 ‘악보 해설’ 등의 음악을 공부하는 요령에 대해 전반적인 강의를 하는 마스터클래스 수업을 진행하게 되죠.


이 캠프를 통해서 제가 해외에서 배우고 얻은 지식과 경험을 한국에 있는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물론 음악 수업 외에도 제가 강연할 때 얘기하는 저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줄거구요. 그리고 피아노 연주자로서 갖춰야할 마음가짐과 인성에 대한 이야기도 꼭 전하고 싶어요.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 연주자는 특히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해지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반응이 좋으면 기뻐하게 되고, 사람들의 반응이 나쁘면 울적해지기 마련이죠.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잖아요. 예수님이나 부처님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하물며 한 연주자가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겠어요? 연주자는 사람들의 반응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먼저 이겨낼 줄 알아야 합니다. 반응이 좋을 때도 스트레스를 받게 돼요. 이렇게 반응이 좋으면 그다음 공연은 더 좋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기 때문이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연주자나 음악가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춰야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가는 종속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는 동양인처럼 아담한 코를 갖기 위해 성형을 하고, 우리 동양인들은 서양인처럼 오뚝한 콧날을 갖기 위해 성형을 합니다. 어떤 게 맞는 걸까요?


이 문제의 해답은 모두 예쁜 코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예쁜 코지만 자기 자신만 마음에 안 드는 거죠. 이렇게 하고 싶은 심리적 근거는 바로 다른 사람 마음에 들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자기 스스로 내가 코를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라며 아무 근거 없이 자신을 설득하려 하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또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기운이 나는지 이렇게 모두 나를 기준으로 먼저 생각하고 판단하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만약 제가 ‘이 곡을 연주하면 사람들이 좋아할까?, 내가 이 곡을 연주할 때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보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했다면 저는 지금까지 연주를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 스트레스를 감당해낼 자신도 없고요. 스트레스는 남이 주는 것보다 자신이 자신 스스로에게 주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건강’입니다. 내가 먼저 건강해야 아픈 사람을 도울 수 있잖아요. 내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건강한 연주가 나오고, 그 건강한 연주는 관객들에게 긍정적인 모습으로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이렇게 건강한 심신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본인의 건강을 많은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는 그런 연주자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저의 이런 저의 메시지를 ‘캠프’를 통해 한국에 있는 학생들에게 꾸준히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이번 7월 캠프를 시작으로 더 많은 학생들과 교감하며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를 함께 공감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도록 합니다. 비단 음악가와 연주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발전을 기대하는 모든 국민분들의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리며 이번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저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인터뷰 요청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제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자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5월 24일 교통방송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이준동]


임현정 - 왕벌의 비행


사용된 글과 인터뷰는 직접 취재/작성한 자료입니다. 브런치 저작권 규정 개정으로 근거자료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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