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뾰토 Dec 05. 2023

이 어중간한 재능

 나는 기억력이 좋다. 갑자기 웬 자랑질인가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기억력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부러워하는 암기력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이나 법령을 외우는 것 같은 일에는 전혀 재능이 없다. 그렇다면 눈썰미가 좋다는 뜻인가 싶겠지만 애석하게도 그것과도 다르다. 오히려 나는 눈치가 없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라서, 남들 다 아는 소문의 마지막 종착지가 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느낌이다. 사람의 표정, 장면의 뉘앙스, 공기의 냄새 따위들. 실질적으로 무언가에 도움이 된다고 자랑하기도 애매한 능력이다. 이 어설픈 재능 때문에 한때 나는 내가 꽤 똑똑한 줄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서서히 알게 되었다. 내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 시행착오 끝에 나는 내 머리에 대한 기대를 조금씩 놓아갔다.


 하지만 애매한 기억력이 도움이 되는 일도 있다. 바로 에세이를 쓸 때이다. 내 에세이의 소재는 주로 어린 시절의 경험들인데, 어릴 때의 일을 쓰다 보면 그때의 감각이 저절로 떠올라서 순간이지만 어린 시절을 다시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에세이 쓰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도 부쩍 붙었다.


 그런 내가 요즘 곤경에 처해있다. 최근 쓰고 있는 내 첫 단편소설의 진도가 영 나가지 않는 것이다. 에세이도 글이고 소설도 글인데 어째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이럴 때 필요한 건 분명 힘을 빼는 것. 잘 쓰려는 욕심을 버리고 에세이를 쓸 때처럼 반쪽짜리 기억력을 쥐어짜 내 감각이 들어간 글을 써 내려간다. 얼기설기 넝마 같은 문장 덩어리일지라도 부디 끝까지 쓸 수 있기를. 글이 완성된다면 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어중간한 재능아, 마구마구 써버리자. 마지막 마침표까지 찍어버린다면 나는 너를 더 이상 아쉽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잘 부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