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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뾰토 Oct 09. 2023

29살, ㅂ언니

내 첫 직장은 한 카드사 콜센터였다. 거기서 만난 ㅂ언니는 나보다 8살이 많았 같이 들어온 10명 남짓의 신입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면서도 유일한 대졸자였다. 29살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앳된 얼굴. 동글한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쓴 것이 비슷해 보였는지 사람들은 나와 언니가 닮았다고 했다.


나도 스물한 살이었지만, 20대 초반에 콜센터로 들어온 아이들은 여유가 있었다. 언제라도 수틀리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말투와 몸짓에서 묻어났다. 실제로 교육을 다 말고 화장실을 간다고 말한 아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은 일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언니는 달랐다. 차분한 음성에 성실한 업무를 하는 태도.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하는 나의 물음에 ㅂ언니는 이 카드사 전에도 백화점 콜센터를 다녔다고 했다. 하지만 언니의 능숙함과는 별개로 어쩐지 언니를 볼 때면 가끔 길 잃은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동그란 안경 너머의 작은 눈은 자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것은 아마 나 역시 길을 잃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양치를 하기 위해 줄을 서 있으면 어김없이 귀에서는 오전 들은 성난 목소리들이 울리고 정신도 함께 멍해져서 어느 순간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 하는 생각에 빠져들곤 했다.


 저녁 7시가 되어도 해는 쨍쨍한데 이상하게 바람은 많이 불던 어느 날,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ㅂ언니가 말했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 고등학교 때든, 대학 때든, 사회에 나온 때든 정말 열심히 살았다.”


 무어라고 대꾸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언니,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요.’ 같은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얼마 후, 나는 다른 20대 초반들처럼 회사를 그만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개학은 한 달이나 남았고 굳이 이유를 대자면 재미가 없어서 계속 다닐 만큼 좋은 자리가 아니어서였을까. 그리고 그대로 잊어버렸다. 콜센터도 ㅂ언니도. 그런데 신기한 것이 나이가 들수록 어느 날 한 번씩 벌집 같았던 콜센터의 풍경과 거기서 열심히 콜을 받던 ㅂ언니가 생각이 나는 것이다.


 어느새 ㅂ언니보다 훨씬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타고나길 둔하고 한 박자 느린 나는 이제야 겨우 언니에게 해줄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가끔 버스정류장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날이면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고는 하는데 그 말을 적자면 이러하다.


 인생 참 쉽지 않아. 그런데 언니, 인생은 그냥 인생이야. 인생은 언니야. 언니의 성실함이 결국 언니 스스로 수렁에서 걸어 나가게 만들 거야. 언니보다 더 산 내 말을 믿어. 언니는 결국 행복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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