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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뾰토 Oct 20. 2023

우물이 있는 집에서 소나기를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개학을 며칠 남겨두고 야반도주를 하듯 이사한 집에는 우물이 있었다. 사실 그 집에는 감나무도 있고 앵두나무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집을 생각하면 우물부터 떠오른다. 하지만 우물은 내가 이사 온 무렵에는 이미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우물의 입구는 판자로 막혀 있었는데 나는 자주 입구를 열어 우물 아래를 들여다보는 상상을 했다. 우물 근처를 기웃거리는 내 모습이 위험해 보였는지 옆집 아저씨가 우물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리가 이사 온 주택은 예전에는 기생집이었는데, 어느 날 기생집에서 일하던 하녀가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빠져 죽고 말았고 그 이후로 우물은 쓰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


 아저씨의 상냥한 의도와는 다르게 나는 그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자주 우물을 생각했다.

 ‘하녀는 바로 죽었을까? 혹시 며칠 동안 발견되지 않아서 혼자 무섭지는 않았을까? 하녀 말고 다른 것들도 빠지지 않았을까?’

 우물 하나를 두고 이런저런 상상을 한 것은 내가 유달리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여서는 아니었다.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날 때 사교성을 엄마 뱃속에 두고 태어난 나는 어딜 가나 겉도는 아이였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거의 없는 아이처럼 길러졌다. 내 짧은 인생은 정신없으면서도 모순적이게도 지루했다.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다이애나 같은 착한 친구가 갖고 싶었지만 나 같이 재미없는 어린이와 친구를 해줄 아이는 없었다. 삶의 지겨움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야기를 보고 상상하는 것뿐.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전학 온 시골 학교에는 도서관도 학급문고도 없었다. 엄마가 방문판매원의 상술에 휘말려 얼떨결에 구매한 위인전과 만화 한국사 전집만이 내 유일한 친구들이었다.


그런 나에게 새 학기 교과서는 귀한 신작이었다. 학교에서 새 학기 교과서를 받아오면 모든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리는 것이 나의 루틴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그 해도 가장 좋아하는 국어 교과서부터 읽고 있는데 아주 마음에 드는 소설을 발견했다. 황순원의 소나기. 교과서에 실린 작품 중에 처음으로 생략된 부분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소나기를 사기 위해 읍내로 가는 버스에 탔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애가 혼자 버스에 타자, 기사 아저씨가 걱정하셨던 게 기억난다) 두풍 출판사에서 나온 소나기 정가 4000원. 두툼한 두께 때문에 소나기가 원래 이렇게 긴 소설인가 오해했지만, 다행히도(?) 단편집이었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는 황순원 작가에게 다른 소설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작가는 여러 작품을 쓰는구나. 아쉽게도 황순원의 다른 소설들은 소나기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아주 오래도록 곱씹으면서 좋아한 기억이다. 내가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탔고, 처음으로 서점 구경을 했으며, 처음으로 내 돈으로 책을 산 경험. 나는 이 기억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이런 기억들 덕분에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오늘도 소중한 추억을 선물해 준 어린 나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꿈에서라도 만난다면 기특하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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