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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 이십삼세 Jul 27. 2023

나의 하루키 입문과 재즈

그냥_드는 생각(1)

 내 기억 속에서 꽤 오래 남아있는 소설은 몇 종류가 있다. 아마 제일 첫 소설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고, 그 이후가 <해리포터>시리즈였다. 두 종류 모두 읽으면서 달콤한 상상, 초콜릿을 먹는다던지 버터 맥주를 마신다던지 하는, 이 가능했던 이야기들이었다.

    

 초등학교의 베스트셀러가 위의 두 권이었고, 중학교 때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중학생이 된 나에게는 책 말고도 많은 유희수단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됐다. 더구나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나에게 큰 변화가 찾아와, 집에서도 가능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공부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하고픈 거 하면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그때 내 방과후 일정은 학교에서 돌아와 거실에 있는 그늘막을 이용하거나, 혹은 소파에 기대 아이패드로 게임을 하거나, 당시에 좋아했던 건담을 만드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저녁 먹고 잠시 운동 갔다가 낮 루틴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 하루 일상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스마트폰으로 여러 가지를 하기 시작했고, 그 중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웹툰’이었다. 그때의 여러 작품들 <쌉니다 천리마마트>, <아이들은 즐겁다>, <마음의 소리> 등 굵직한 명작들을 계속 보고 봤던 것 같다. 당시에 즐겨본 웹툰은 ‘허5파6’ 작가의 것이었는데 요즘 말하는 잔잔한 감성을 해당 작품에서는 다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그게 좋았다.

     

 <여중생A>라는 작품을 보면 왕따인 한 친구가 사회로 나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늘 그렇듯이 도서관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주인공의 글쓰기 능력을 질투하는 반장이 나온다. 주인공과 반장은 대비되는 위치에 존재하지만, 그 둘은 ‘책’이라는 것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안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하루키는 표현이 너무 야하지 않니?” 이 대사였다. 이 대사가 나로금 그 책을 읽게 만들었다.     


 그때 읽었던 소설이라고 해봐야 고전소설들 아니면 <윔피 키드>였던 나에게 소설이 야하다는 것은 색다른 기분이었다. 게다가 나이까지 중학생이니 그 기분은 더 했으리라. 그 대사를 마음에 품고 다음날엔가 학교 도서관을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찾은 책은 <1Q84>였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두꺼운 책이 3권이나 있었고 그 것들이 전부 시리즈였다는 것. 그 중 1권을 빌려 나오고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과연 소설에는 그러한 표현이 가득했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불온서적을 읽은 것 같지만, 당시에는 그만큼 충격일 수 없었다. 그렇게 읽기를 한시간, 두시간.... 책상 위에 올려진 책을 보고 국어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뉘앙스가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을 읽다니, 대단한데?’ 하는 그 뉘앙스. 그 앞에서는 글이 잘 읽히는 척 했지만 사실 중간부터 이해가 안 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끊어진 맥락을 되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유야무야 덮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이 내 중학교 시절 하루키 이야기이다. 야한 표현이 궁금해서 책을 빌렸는데, 책은 더럽게 읽히지 않았고 중간에 접었던 것이었다.

    

 약 5년 정도 흐른 후, 어느 날 문득 하루키가 떠올랐다. 자세히 말하면 하루키가 아니라, 국어선생님이 칭찬을 해주던 그 날이 떠올랐다.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었다. 그 길로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 <1Q84>를 빌려왔다. 책은 여전히 두꺼웠고, 많은 사람들이 돌려본 듯이 책의 상태도 예전 같지 않았다. 커버는 없어졌고, 검정색 하드커버가 유일한 덮개였다. 그래도 내용은 깔끔해서 다행이었다.     


  그 책은 여전히 표현의 수위가 있었고, 나는 중학교 시절의 기억을 곱씹으며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갔다. 다만 이번에는 흐름이 좀 더 잘 들어왔고 책에 있는 사소한 단서들까지 고민을 하며 읽어나갔다. 하루키의 특성 상 책 중간 중간에 재즈, 클래식 등의 음악을 묘사하는데, 이 음악들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찾아 들어보았으니, 어떻게 보면 내 재즈의 첫 시작은 하루키가 시켜줬다고도 볼 수 있다.     


 <신포니에타>, <Beeal street Blues>, <It’s only a paper moon> 등의 노래는 모두 책과 잘 들어맞았다. 이제는 음악을 들으면 그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장면을 연주하는데, 덴고가 뛰어다니거나 아오마메가 도망치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음악과 책이 퍽 잘 어울리는 요소라는 것을 파악했다. 또 적당한 음악을 적당한 장면에 배치시키는 것이 대단한 능력이라는 것도 알았다.  

유튜버 <JAZZ IS EVERYWHERE>의 채널에 업로드 된 플레이리스트.

 하루키의 책과 음악의 조화는 나를 빠져들게 만들었다. 물론 세계와 다른 세계를 오가는 그 표현도 재미있었지만, 음악이 책과 잘 맞는다는게 너무 좋았다. 그 음악은 마치 책을 위해 태어난 것 같았고 그 음악 속에서 나는 그 장면들을 계속 반복할 수 있었다. 그런 느낌을 <1Q84>에서 배우고 나는 이내 하루키의 책들을 조금 더 찾아보기로 했다.     

 그 후로 <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 등의 책도 읽어보았는데, 모든 책들이 빠져드는 느낌을 주었다. 나보다 앞선 독자들은 이미 그 책들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놓았고, 그 음악들과 함께하는 작품의 전개는 모두 부드러웠다. 그것이 세상을 옮기고, 사람이 바뀌더라도 그것은 더 깊은 몰입을 제공했다.     


 여기서 하나 짚고 가야하는 것은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 빠져들었고, 읽는 순간순간 재미있었지만 막상 해당 작품에 대한 해석에서는 내 세계관보다 열 배는 더 깊은 사고를 하고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냥 이야기가 재밌었고 그 서사와 재즈의 궁합이 좋았을 뿐이지, 작품을 읽으며 인간의 상실에 대한,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렇게 보니 내가 하루키의 책을 좋아한다고, 추천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작품의 심연을 보지 못한 사람이 그 책을 추천하면 제법 웃긴 모습일 것 같아서.     


 비록 웃긴 모습이라도 책을 추천하고 싶다. 심연의 의미들은 각자 겪어온 삶에 따라서 이해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실제 삶에서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사고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경험의 종류와 양에 따라 모두의 사고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하루키의 단어를 해석하는 것도 그렇게 차이가 날 테니, 나는 심연의 의미로 인해 추천하기보다는 이야기 자체로의 서사. 그 이야기가 재즈와 맞물려 내는 화음을 다른 사람들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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