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된 로맨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던 날.
내 마음 속에는 큰 구멍이 뚫린 듯했다.
그들의 노래가 내 삶의 배경음처럼 흐르던 시절이
통째로 사라진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낯설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 해, 새로운 '우리' 오빠들이 등장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열광했고 그들은 우리의 하늘처럼 빛이 났다.
그때의 나는
아직 내게 펼쳐질 세상을 잘 몰랐던 꿈많던 13살 소녀였다.
어느 작은 소도시의 한 국민학교 6학년 9반.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항상 생각이 많았고 고민이 많았다.
그 때의 일기에도 '나는 내가 다 커버린 것만 같다.' 라는 글을 쓴 걸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이 많은 사람인 건 여전하다.
성격은 밝은 편이었고, 친구들과 방과후 모여 노는 시간을 제일 사랑했으며 HOT의 칠현오빠에게 마음을 다 빼았겼던 영락없는 13세 소녀였다. 피아노와 첼로를 연주했고 오빠들의 춤을 따라추는 게 정말 뿌듯했으며 반에서 좋아하던 남자친구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풋내나는 귀여운 추억을 안겨주었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별다른 감정을 주는 아이는 아니었다.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며 축구를 하던 모습,
하늘색 체육복에 안경을 쓰고 열나게 뛰어다니던 그 모습이
나에게는 그저 하나의 풍경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가끔씩 그가 나에게 슬쩍 던졌던 미소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내던 그 똑똑한 모습이 어렴풋이 마음에 남았던 것 같다.
그가 나에게 특별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는 그저 같은 반 친구일 뿐이었다.
뒤에 알게 되었지만 그도 당시에 같은 반 키가 제일 큰 여자애를 좋아했었다 한다.
1997년, 그렇게 우리는 졸업을 하고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서로의 인생에 더는 연결되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13년이 지난 어느 날,
그와 다시 마주쳤을 때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알아볼 수 없었다.
그때의 소년은 어디로 가고, 이젠 성숙해진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그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그게 설렘일까, 아니면 놀람일까?
내가 예전 그 아이와 맞닥뜨린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과 대면한 듯한 기분이었다.
옛날의 풋풋했던 소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더이상 안경을 끼지도 않았고 하늘색 체육복을 입지도 않았다.
카키색 눈동자에 깔끔한 정장을 입은 그는 심지어 눈웃음을 끊임었이 날려댔다.
누나를 만났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쉴새없이 날려대는 눈웃음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완전 꾼이겠구나! 절대 엮이면 안되겠다!
하지만 연락처를 서로 주고 받고 그 다음날 그가 나를 부산까지 태워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솔직히 매우 당황했다. 너무 부담스러웠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한시간 넘게 차를 타고 가야한다는 게 상상만 해도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곧바로 거절했다.
그러나 먹히질 않는다. 끊임없이 데려다 주겠다고,
자기도 일이 있어서 법원 근처에 갈 일이 있는데 혼자 가기 심심하니 같이 가자고.
옆에서 문자 릴레이를 보시던 엄마 왈,
"저 정도로까지 얘기하는 데 그냥 불편해도 니가 참고 가라 마!"
엄마는 모르실거다. 엄마의 그 때 말 한마디로 그가 지금의 사위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쨌든 그와의 불편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라? 생각보다 말을 술술 잘시킨다. 내가 말이 마구 하고 싶어졌다.
말하는 게 재미있어졌고 계속 말하고 싶어지는 내가 신기했다.
그는 광안리를 가보고 싶다고했고 우리는 그렇게 광안리 밤바다를 산책했다.
6월 초여름의 부드러운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며 그와 나 사이의 공기를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타소리에 마음도 사르르 풀어졌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갔더니 신청곡을 받아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가 곡을 하나 신청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가수분이 그를 크게 부르더니 그 곡말고 다른 곡을 한 곡 신청해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가 신청한 곡이 '제주도 푸른밤'.
기타 소리에 맞춰 조용히 흘러나오는 ‘제주도 푸른밤’이 우리의 감정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함께 걷던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다시 누군가에게 이렇게 설렐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와 나 사이에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너무 빨리 찾아온 건 아닐까,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보았다
한편으론 그와의 재회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까워지는 게 어색하기도 했다.
계속해서 연락을 하면서도 전화 통화를 자주한 건 아니었기에 흔히들 말하는 어장관리처럼 느껴졌다.
그는 정말 나에게 진심일까?
아니면 단지 나에게 흥미를 느끼는 걸까?
이게 진짜일까?
그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질수록 내 머릿속의 의문도 함께 커져갔다.
그의 진심을 알기 위해선 시간을 더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점점 흘러가면서 우린 점점 가까워졌고 설레는 순간들이 조금씩 더해져 갔다.
가끔은 그와 아무런 특별한 일 없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두근거렸다.
커피를 마시며 웃고, 길을 걷고, 영화 한 편을 보면서도 그 작은 순간들이 모여 우리 사이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새로운 감정이 피어오르곤 했다. 우리가 점점 더 많이 만나고 시간을 보내면서 그 설렘은 깊어져 갔고 나는 그와의 관계에서 뭔가 더 큰 감정을 기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너무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어느 날 그가 입을 떼는 순간,
내용을 알지도 못했지만 나는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걸까?
아니면 나에게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하려는 걸까?
그 순간, 내 마음은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긴 낙하를 하는 것처럼 불안정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낮게 들렸다.
왠지 그 순간이 우리 사이를 결정지을 중요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