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ormal Family>(2024)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한 지붕아래로 모여드는 이야기, 김태용 감독님의 <가족의 탄생>(2006) 크레딧 영상을 보게되면, 철도역에서 각자 어디론가 떠나는 개인의 모습을 각각 분리해내어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식구가 되기 전, 연결고리가 없는 것 처럼 보이는 이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스쳐지나가다 다른 노선을 향해 출발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같은 시간대에 존재하는 이들은 한 기차를 타고 떠나겠죠.
<보통의 가족>의 크레딧 영상은 다릅니다. 이 가족은 한 프레임 안에 모여 미소를 지은채 가족사진을 찍습니다. 같은 허진호 감독님의 입봉작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정원(한석규)이 죽기 전 스스로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과는 다르게 '보통의 가족'을 담아내는 사람은 가족(본인)이 아닌 타인입니다. 사진사는 필름카메라로 이들을 촬영합니다. 요즘 필름으로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니죠. (카메라는 아마 마미야의 중형모델로 보입니다) 이 영화적 장치는 보정없는 현실 그대로의 상(像)을 담아낸다는 은유로 보이기도 합니다.
허진호 감독님의 이 두 영화에서 사진을 담아내는 사진사가 누구인지 컷을 추가하면서까지 관객에게 굳이 보여주는 것은 이 객체로 하여금 영화가 응시하는 피사체(정원과 보통의 가족)가 어떤 군상인지 다르게 묘사하고 싶었기 때문일겁니다. 정원(한석규)은 죽기 전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혹은,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사진을 남겼다면, '보통의 가족'은 서로의 느슨한 연결고리를 견고한 것 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며, 가족이 아닌 타인의 손에 이 작업을 맡깁니다.
언급한 두 영화의 군상과는 다르게, 같은 식탁 위에서 각자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보통의 가족>은 같은 곳에 있지만 이들의 마음은 제각기 다른 곳으로 향하는 모양새로서 하나의 큰 행복을 위해 합치되지 않습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를 펼치면 첫 줄에 이런 문장이 쓰여져 있는 것이 떠오릅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형제관계인 '재완'(설경구)과 '재규'(장동건) 가족의 모습은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차가운 이성을 내세우는 '재완'은 법에만 어긋나지 않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며, 재산을 끌어모으는 사람인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에 반해 '재규'네 집안은 능력은 출중하지만 정의에 봉사하며 욕심을 버린 채 서민의 형태를 갖추어 살아가고 있죠.
우리가 동화 <흥부와 놀부>를 읽으며 마음을 둘 곳은 놀부네가 아닌 흥부네 집안인 것 처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관객들은 자연스레 '재완'보다는 '재규'의 집안 사람들이 바람직한 인간상인 것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화는 '재규'의 집안을 보편적인 한국 가족으로 묘사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의 아파트에 거주하며 휴대폰은 갤럭시를 사용하고 자동차도 현대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반대로 '재완'의 집은 필라테스를 위한 방이 따로있을 정도로 호화스러우며 아이폰을 사용하고 자동차도 벤틀리를 타고있죠.
영화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어느 도로 위에서 운전 중 시비가 붙어 한 가족을 들이받아 아버지를 죽음에 이루게 하고 딸을 혼수상태로 빠지게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피고가 된 이 남자를 변호하게 된 것이 변호사 '재완'(설경구)이며 이 딸을 치료하게 된 사람이 '재규'(장동건) 입니다. 이로서 흥부와 놀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은 공통된 사건을 각자의 시선대로 해석하며 서로의 가치관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재완'은 국가에서 정한 법에만 어긋나지 않다면 피고를 무죄로 만드는 것은 합당하다 주장합니다. 동의하지 않는 '재규'에게 그 근거를 몸소 보여주고 싶었는지 '재완'은 저녁을 먹고 나오는 '재규'를 자동차로 들이받을 뻔 하며
"내가 핸들을 틀어 너를 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법정에 가면 차도에 서 있었던 네 잘못도 판단의 기준이 되지" 라며 정당화 합니다. 서로 다른 윤리적 기로의 서게 되는 둘을 보며, 우리는 법과 이성에 대한 도덕적 모순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둘에 대한 인식은 영화가 의도하는 변주에 따라 뒤바뀌게 됩니다. 그 흐름의 맥을 끊은 것은 또 한가지 사건에 휘말리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자식이 연고없는 노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살인사건에 연루되면서 부터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합당한 심판을 받아야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만약 그것이 내 자식 일이라면? 이라는 질문이 두 가족에게 던져집니다. 목격자가 없기 때문에 발각될 가능성은 낮았지만 '재규'는 분노하며 아들 시호(김정철)를 자수시키려 합니다. 그에게는 도덕적으로 '바른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재완'은 달랐습니다. 딸을 심판할 증거가 없으니 마치 공정한 재판의 판사로서 딸의 범죄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재규'(장동건)의 현대자동차는 소박하면서 인간적인 면모와 정의를 지키려는 그의 신념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의 아들이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 처럼 어느날 갑작스레 도로위의 야생동물을 직접 자동차로 들이받게되며 그 신념에 금이 가게 됩니다. 아마 그 시점부터 '재규'는 핸들을 잡은 자신이 아닌 도로위에 튀어들어온 야생동물의 책임이 있을 수 있겠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시야를 방해하는 유리의 이 균열이 바르고 선명하게 전방을 주시해야 하는 운전자의 의무(죄책감)를 저버리는 무서운 합리화가 됩니다.
'재완'(설경구)은 달랐습니다. 아내까지 새로 들일 정도로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바꾸는 것이 그의 신념입니다. 살인자도 증거가 없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무죄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 입니다. 하지만 후에 마음을 바꿔 딸에게 자수를 시켜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려 합니다. '사람' 대신 쓰여진 '피해자'라는 대명사 속에 가려진 그들의 인간적인 내면, 그리고 베이비캠(3자의 눈)을 통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딸의 모습을 우연히 보고 환멸을 느끼면서부터 입니다. 뒤바뀌는 둘의 신념이 매끄럽게 교차되지 못하고 또 다시 충돌하며 끝내 이야기는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보통의 가족>은 절대성과 상대성이 가져오는 모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 어떠한 사건의 공식에도 절대 변하지 않는 법과 정의 같은 절대성과, 시시각각 변하는 상대성에 치환되는 이 값들은 서로 충돌하여 한가지 답에 들어맞지 않게 됩니다. 두 가족으로 하여금 강한 신념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보통의 가족>이 이야기하는 '보통의 모습'이 과연 무엇일까요. 기만하고 자기합리화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이 진정한 '보통의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귀엽고 둥글둥글한 그림과 함께 적혀있는 동화책, <흥부와 놀부>가 말하는 권선징악의 선형적 사고는 날카롭게 선명하고 비선형적인 현실세상에서 들어맞을리 없는 따분한 훈계가 되어버립니다. 이 역설적 교훈이 아이들이 읽고있는 필독서를 다시금 선정해야 되는 시기가 온 것은 아닐까 의문을 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