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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룽지 Jan 03. 2025

뮤지컬 입문기

뮤지컬 <마타 하리> 

Musical <MATA HARI> · 180min

뮤지컬 <마타하리> 대본집

난생 처음 뮤지컬을 보았다. (브로드웨이에서 '캣츠'를 본 적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처음이라 첫 뮤지컬로 퉁치자)

만족했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뮤지컬 영화를 원체 좋아하기에 기대를 가졌으면서도 사실 보기까지 걱정이 많았다. 스테이지에서 보여줄 수 있는 물리적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소극장에서 보았던 연극이 기대 이하여서 그런 상념이 더욱 꼬리를 물었다. 이 '무대극'이 18만원이라는 값을 설득 해줄까 또 크리스마스는 망치지 않을까 하면서. 


편견은 모두 사라졌다. 생각 이상으로 세트는 휘황찬란했다. 장(scene)이 넘어갈 때마다 뮤지컬의 세트 테이블들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예언자처럼 관객들이 봐야할 곳을 미리 비춰주는 조명, 따라가는 음악 그리고 열성있는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그 모든 것들이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마치 복잡하게 설계된 오르골이 작동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달까. (수사적 표현만이 아니라 거대한 세트가 빙빙 돌아가는 모습이 정말로 그렇게 보인다)


이런 이미지를 직접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만 하지 않을까. 하지만 무한한 상상력을 실현하기에 영화를 뛰어넘기는 힘든 것 이다. 자본만 충족한다면 영화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극만이 성취할 수 있는 신선한 지점이 분명히 있다. 원래 영화 또한 무대극의 파생이지 않은가.


무대극은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와이드릴리즈 시스템과는 다르다. 언제 어디서든 꺼내볼 수 있게 다량 복제되어지는 영상물과는 다르게 건반에서 손가락을 떼버리면 곧바로 멈춰 버리는 피아노 연주처럼 계속해서 반복하며 공연하는 뮤지컬 창작자들의 수고가 필요하다. 이 현장감이 관객을 극과 더욱 동화되도록 돕는다. 오히려 시공간의 속박이 관객과의 감정적 교류에 가교역할을 하는 것 이다.


뮤지컬 <마타하리>에는 이런 대사가 두어번 나온다.

[마타하리] "안나, 관객은?"

[안나] (관객석을 바라보며) "지붕까지 꽉 찼지"

우리를 보고 이야기 하는 것 인가? 나는 이 장면에서 잠시 극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짐을 느낀다. 무대극의 장점을 열거할 때 꼭 등장하는 ‘관객과의 소통’을 마타하리는 이런 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마타하리>는 뻔한 신파극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렇게 몰입할 수 있는 이유는 마음 속에 작은 관용이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 해본다. 요즘 많은 것들에서 관용과 여유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 까닭에 대해 무엇일까 또 생각해보면. 세상은 점점 관음하기 쉽게 변화하고 있다. 갈수록 썬팅이 점점 짙어지는 도로 위 자동차처럼 말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저술한 것 처럼 본래 '인간 종'은 상호작용을 통해 움직이는 동물이다. 관음을 하는 대상에겐 관용을 베풀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 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니까. 유튜브 댓글들이 유독 공격적인 것에는 이런 원리가 숨어있다고 본다. 매일 영화만 보며 스크린으로 일방적 관음만 하던 나에게, 섬세하면서도 열성있게 열연하는 모습의 뮤지컬 배우들을 보니 꽉 닫힌 머릿속이 시원하게 환기가 된다. 이 극장에 앉아있는 수백의 사람들은 세상을 관음하고 외면하고자 하는 게으른 본능을 뿌리치고 관용과 공감을 믿는 사람들일 것 이다. 난 그렇게 믿는다.


사료나 시대극을 뻔한 훈계처럼 혹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와 상관없는 상투적인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아마 누구나 그럴 것 이다. 그것들은 마치 실학과는 거리가 먼 무용한 것 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가며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내고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며 비로소 그 고통을 감각할 수 있게 되자 과거의 모든 인간들은 나와 같았다는 것을 선명히 깨닫는다. 우리는 유장한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은유 아래 세대를 거듭하며 계속해서 반복되는 삶의 굴레에 갇혀 있는 것 이다. 그 불편한 사실이 그저 피상적인 캐릭터 였던 것 들을 점점 사람으로 볼 수 있도록 성능 좋은 안경을 내게 쥐어주었다.


공연을 관람하며 눈물이 맺혔다. 누군가는 필요 이상의 감상주의에 빠졌다고 할 수 있겠다. <마타하리>는 마타하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희생된 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뮤지컬은 픽션이지만 그 역할들이 묘사한 한 명 한 명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었던 '실존인물'이다. 펭르베 장관을 두르고 있는 군인들과 시민들의 완벽하고 훌륭한 군무가 나는 마리오네트의 휘적거림으로 투영되어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무안참사를 목도하며 사람의 생명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너무 허무하고 억울하게 사라진다고 느낀다. 태평성대에 태어나 안위를 누리며, 플라톤의 동굴에 갇혀 그림자만 보고 있는 우리가 고개를 돌려 빛의 발원지인 저 바깥을 응시해야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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