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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스방 Feb 12. 2024

퇴직금 탈탈 털어 맞바꾼 해장국 집

싱가폴 해외전략회의를 다녀오고 나서 가족을 생각하면 그렇게 용감하게 사직서를 내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전에 직장에 사표를 냈을 때와는 다르게 두 번째 낸 사직서에 아내는 내심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더욱이 아이들이 셋이 초중고를 나란히 다니고 있는데 아이들의 뒷바라지가 버겁게 여겨졌다.      


며칠 동안 고심 끝에 경제적인 상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음식점을 차리 기로 마음먹었다. 

신문기사에서 자영업자 10명 중 7명은 실패한다는 기사를 보고서도 역설적으로 나는 그래도 3명은 성공한다는 믿음이 강하게 작용했다.

마침 고등학교 동창이 식당을 하고 있어서 그에게 조언을 구하며 그 친구가 하는 체인 식당을 하기 위해 여의도 본사를 오르내렸다.      


상권을 찾아서 음식점 자리를 구하다가 동네 길목을 지키고 있던 자동차 정비 점포를 권리금을 주고 얻었다. 

깊은 생각도 없이 두 번째 사직으로 가족에 대한 무책임한 결정을 만회하고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퇴직금과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무모하리만큼 성급하게 음식점을 차렸다.      

그 당시 언론에서는 기업들의 구조조정 틈바구니에서 직장 밖으로 튕겨 나온 직장인들의 새로운 도전을 다루는 인생 2막의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여기저기 신문에서 소개되었다. 


나 역시 그 시절 분위기에 휩싸여 매일경제신문에 

‘금융권 출신 성공 창업 전단지로 홍보하고 단골엔 멤버십 카드’ 

제목으로 음식 담은 그릇을 들고 애써 연출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과 함께 소개되었다.      

신문기사를 본 지인들이 어떻게 음식점을 차렸냐며 걱정 반 격려 반의 이야기로 며칠 동안 전화가 이어졌다.

 

음식점 아이템으로 대중적인 음식이란 점이 마음에 들어 덥석 해장국 프랜차이즈 계약을 했다. 

그전에 내가 대학교 입학할 때 어머니와 살면서 생계를 위해 궁색하게 차렸던 분식집과는 달리 해장국집이라는 서민적인 분위에 포근한 이미지를 담으려고 인테리어에 정성을 쏟았다. 

식당 내부 벽면에 삶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가 있는 민화를 커다랗게 두 편 그려 넣어서 손님들이 식사하면서 민화를 감상하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화장실에는 개인용 손수건을 말아서 놓아서 위생과 편리함뿐만 아니라 손님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표현했다.      

주변의 해장국집과는 다른 모습으로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함께 일할 직원을 채용하고 인테리어 공사가 완성되어 내가 다니고 있던 성당의 신부님과 신자들을 모시고 개업 축성식을 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개업 첫날은 지인들의 방문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해장국 음식점의 특성상 24시간 영업으로 늦은 시간이나 새벽에 오는 지인과 손님들로 첫날 하루를 꼬박 뜬눈으로 지냈다. 


지인들이 보낸 수많은 개업 축하 화환이 식당 앞 길가에 작은 식물원을 만들기도 했다.      

음식점을 개업하고 지인들과 전 직장의 임직원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단체로 발걸음이 이어져서 몇 달 동안은 ‘눈코 뜰 사이 없다’라는 말이 이런 것인가라고 느낄 정도로 엄청 바빴다. 

음식점을 개업하면 속된 말로 ‘개업 빨’이라고 해서 두서너 달은 인사차 찾아오는 지인들과 호기심에 어쩌다 방문한 동네 손님들로 장사가 잘된다고 한다. 


이러한 통설에서 빗나가지 않은 듯이 개업하고 넉 달이 지나면서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장국이라는 음식이 워낙 대중적이어서 동네 가까운 데서 먹곤 하는데 지인들이 그동안 일부러 멀리까지 왔던 것은 나에 대한 연민과 격려의 마음이었다. 

장사에 대한 경험과 틀이 전혀 없었던 나는 장사는 잘 돼도 걱정이고 안 돼도 걱정이라는 푸념 섞인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음식점에 오는 손님들의 성향도 다양해서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거나 서로 치고받고 싸움이 일어나 이를 뜯어말리려고 애를 먹기도 하고 경찰이 출동해서야 겨우 해결되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종업원들은 한창 바쁜 날 연락도 없이 결근해서 애를 먹이고 툭하면 사정이 있다며 월급을 미리 가불하고 그만두는 경우도 생겼다.      

직장 생활만 죽 해왔던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건강하지 못한 아내가 주방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지고 급기야는 장모님까지도 주방 일을 도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여섯 달이 지나면서 음식점 운영에 대한 고민이 커가면서 영업시간을 24시간에서 18시간으로 단축하고 종업원 수도 줄여서 고정비용 부담을 줄여야 했다. 

음식점 운영에 대한 개선으로 경제적인 것은 다소나마 유지해 나갈 수 있었으나 아내의 건강과 장모님의 염려가 커져갔고 무엇보다 의기소침해진 아이들의 모습에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음식점과 가정의 경계가 무너지고 아이들을 보살펴줄 아내도 음식점 일에 몰두하다 보니 나란히 초중고를 다니는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하지 못하는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해 어버이날에 아이들은 식당 한쪽에서 밥을 먹고 나와 아내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편지를 주면서 아쉬운 눈초리로 머뭇거리다가 이내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영업을 마치고 당시 고등학생 큰딸이 주고 간 편지를 읽으면서 눈가에 눈물이 맴돌았다. 

편지에는 서운함이 가득 차 있었다. 

학교를 갔다 오면 항상 집에서 반겨주던 엄마가 없고 동생들도 그전같이 활발하지 않아서 걱정스럽다는 큰 딸아이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무엇보다도 편지 끝에 매달리듯 표현된 아이들의 간절한 소망이 묻어난 

“아빠가 넥타이 맨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요.” 

글귀가 가슴을 저미게 하면서 눈물을 왈칵 쏟아내게 했다.      


그날 이후 고민의 크기는 커지고 무모하게 저지른 음식점 장사가 후회되기 시작했다. 

개업하고 몇 달 동안을 정신없이 보낸 시간을 뒤로하고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종업원을 줄여야 했다.  그런 와중에 연락 없이 출근하지 않는 직원을 대신해서 아내가 주방을 들어가고 걱정과 염려로 참을 수 없었던 장모님이 주방 일을 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더욱이 한창 활발하게 성장해야 할 아이들의 생기 잃은 모습을 보면서 나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게 되었다. 

나의 성향과 맞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지고 고민이 거듭되면서 체중도 크게 줄어들어 몸도 홀쭉해져 갔다. 

음식점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동산 사무소에 가게를 내놓았지만 계속된 불경기 여파로 음식점을 한다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주변 사람들의 우려에도 잘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멋지게 음식점을 차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의 고통을 느끼게 되면서 음식점을 빨리 처분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꽉 들어찼다. 


음식점을 시작할 때는 내가 내 돈을 갖고 이것저것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음식점을 처분하려고 하니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거니와 음식점의 규모가 어중간하여 인수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 후로 몇 달 동안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일 년이 지나고 나니 아내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나 자신도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툭툭 털어내고 싶은 굴뚝같은 생각에 음식점에 투자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몸만 빠져나간다는 생각으로 기획 부동산에 음식점을 처분해 달라고 내던졌다. 

마침내 인수자가 나타났고 값비싼 비용으로 설치했던 음식점 시설과 밥그릇 수저 하나까지 다 주고는 짓눌렸던 고통의 시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옛말에 젊은 시절의 고생은 좋은 경험이 되므로 달게 여기라는 뜻으로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당시 나는 젊지도 않았지만 설혹 젊었더라도 일부러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남들은 책을 통해서나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의한 충고를 듣고 무모한 결정을 피해 간다고 하는데 나는 퇴직금을 탈탈 털어서 시작한 음식점을 빈손만 남기고 처분하고 나서야 무모함과 무지를 깨달았다.    

  

음식점을 처분하고 몸과 마음은 편해졌지만 비싼 대가를 치르고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하기에는 앞날에 대한 걱정이 만만하지 않았다. 

우선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하고 앞으로 살아갈 계획을 세우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생소하게만 여겨졌던 도서관은 중고등학생부터 나와 비슷한 나이의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직장에 출근하듯이 집 근처에 있는 구립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금융, 인문, 사회 경제 등 다방면의 책을 읽어 나갔다.   

   

나는 마치 도서관에 직장을 얻은 것처럼 아침마다 남들보다 먼저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일찌감치 도서관에 가서 좋은 좌석을 차지하고 하루를 보내는 일을 즐기고 있었다. 

직장이라 여기며 한 달 내내 출근하듯이 다녀도 월급은 없지만 다양한 책을 보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머릿속에 무언가가 들어차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금융권으로의 재취업을 염두에 두고 금융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한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어쩌다 국가공인 금융 자격시험 정보를 늦게 알게 되어 도서관에 파묻혀서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마치 고등학생처럼 열심히 공부했다. 

다행히 얼마 후에 발표된 자격시험에서 아슬아슬하게 합격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무엇을 성취한다는 것이 그렇듯이 노력의 결과가 좋으면 자신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즐겁게 도서관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재취업의 기회를 얻기 위해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운영하는 희망취업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여의도에 있는 교육센터에 가서 저명한 강사의 강의도 듣고 재취업을 도와줄 컨설턴트를 배정받아서 구직 상담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그곳을 다니면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재취업의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라는 생각에 서로 빨리 일자리를 얻기를 격려해 주었다. 


가장으로서 중압감에 쌓여 재취업을 위해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내면서 두리번거리기를 일 년이 다 되어 갈 때 직장의 선배로부터 신협에 다시 돌아올 의향이 있냐는 전화를 받았다. 

그 선배는 내가 다시는 신협에서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 사표를 내고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내가 

“직장에 대한 정이 뚝 떨어졌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내 생각에도 그때는 신협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마음이었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쓰라린 큰 경험을 한 나는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재취업의 문을 두드리며 구직활동에 전력투구하던 나에게 선배의 제안은 사막에서 오아시스가 여기 있다고 알려주는 구원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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