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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Mar 07. 2024

뒤바뀐 운명 속에서 ~

당구장에서 ~ 53

함께 치자는 소리에 상대선수가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다. 지점을 올리지 못했다며 머리마저 끄적이고 있다. 경기 시작을 위해 전자점수판에 터치하는 순간 친구의 닉네임에 빨간불이 번쩍거린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뭔가 싶어 봤더니 내 지점에 맞는 적정 에버리지를 넘어서면 나타나는 신호였다. 그것도 한참이나 차이 난다. 핸디별로 개최되는 아마추어 시합 때문에 점수를 못 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성취욕을 인정해주고 싶지만 함께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치기 싫은 게임을 쳤으니 즐기려다 스트레스만 쌓인 꼴이다. 당구장 어딜 가더라도 겪게 되는 현상이다. 늘 그래왔듯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한국의 당구문화, 대등한 경기를 펼친대도 뒷말이 많은 핸디제도. *'사기다마'라며 치고받던 시절에서 전자보드로 개개인의 점수를 관리하는데도 이지경 이 꼬락서니다. 공인들도 나서며 핸디시합을 부추기는 상황에서 어디 원망할 곳도 없다. "부정핸디 적발 시 상금몰수, 다음시합 출전금지." 당연하다는 듯 시합 규정에 들어차 있는 문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당구문화의 어두운 단면으로 여겨지는 핸디제도는 10분당 요금제도 때문에 생겨났다고 봐야 한다. 개발도상국의 늘어나는 인구와 경제성장이 만들어낸 창작물인 셈이다.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놀이문화라고 해봐야 당구밖에 없었던 것 같다. 볼링이나 골프 등 다른 그 무엇을 쳐다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채 동네마다 당구장 간판은 가로등을 대신해 버렸던 것이었다.


다른 나라와 차별화된 기량의 세분화는 정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공정의 기회를 제공하였지만 잘 치고 싶은 욕심을 시원하게 채워주지는 못했다. 여러 등분으로 나눠지는 핸디와 상금 욕심 때문에 진입 장벽만 높아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배우는 단계에서 이기려는 욕심이 강하게 작용하면 자세가 굳어지게 된다. 올바른 자세를 유지한다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기술을 습득하려 해도 한없이 더뎌지게 되며 창의력은 말할 것도 없다. ** 덕분에 시장은 성장하였지만 기량이 정체되는 모순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도 외우는 대로 공을 다루고 있다. 생각하거나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문제를 풀어내다가 막혀버리면 빈쿠션으로 공략해 버리면 그만이다. 프로당구에서는 이 장면을 보고 함성까지 질러 버린다. 한 번에 두 점을 얻기 때문이다. 연타라도 날리면 입 닫을 새 없다. 세 번 연속이면 신문에 날 일이 된다. 실력 차이가 있어도 빈쿠션 몇 방만 제대로 들어가 준다면 이길 확률도 높아진다. 행운은 말할 것도 없다. 장난스럽지만 상금이 걸린 진지함이기에 뭐라 꼬집을 수도 없는 영역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구장의 요금제도가 활발해지고 있다. 짜장면과 담배내기를 즐겼던 주머니 여유는 빠듯한 게임비용으로 대체되었고 돈내기는 프로화의 상금으로 품격이 높아졌다. 이에 병행제와 정액구장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추세다. 아직 변두리에서 찾기 쉽지 않지만 머지않아 당구문화의 판도가 달라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고령화에 맞춰 시장이 당연하게 따라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음 환경은 상상이 아주 신선하다. 하나의 포지션을 놓고서 맞춰낸 후 다음 포지션을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조급함도 사라져 버렸다. 꼭 빈쿠션으로만 돌려야 할까,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서로 의논하는 모습도 상상된다. 자연스레 기량과 연계되니 실력 또한 마구 늘어난다. 여성들의 당당함도 그려진다. 동네마다 당찬 실력자들이 먼저 기다리며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덕분에 당구장의 소음조차도 경쾌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만 원짜리 한 장으로 짜장면을 먹으면서 하루종일 즐기던 지난날의 추억들.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자긍심을 고취시켜 왔던 그 세월도 지난 지금 이 순간. 도박이냐 스포츠냐, 의미 없는 논쟁의 끝무렵 ***뒤바뀐 운명으로 진화의 과정을 밟고 있는 당구라는 놀이문화. "뭣이 중헌디."라는 영화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차마 네게 '당구 쳐라. 먹고살 수 있다.'라는 말을 건네지는 못하겠다. 다만 지금보다 더 밝아지는 것은 분명하기에 꼭 직업으로 삼지 않아도 얼마든지 욕심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돈이든 명예든 건강이든 말이다.




 *내 실력을 속이는 행위를 '사기다마'라 일컫는다.

 **하수와 고수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닐까. 차이를 굳이 두자면 '끌어치기.'에서 간격이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오래전 "생활체육당구연합회"가 오늘날 "프로당구협회"로 변한 모습이다. 지금은 입장이 완전히 뒤 바뀌어서 생활체육이 주최하던 핸디시합을 "대한당구연맹"이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제자리를 찾은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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