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구와 인간 Jul 25. 2024

그분이 오셨구나

당구장에서 ~ 55

가끔 이런 때가 있다. 하점자와 당구 치면서 말도 안 되게 두들겨 맞는 경우다. 에버리지가 무려 2점대 가까이 나올 때도 있다. 그때마다 속는 기분이지만 쥐구멍에 숨을 상황도 아니어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후 마지못해 칭찬을 꺼내어 든다. 스트록이나 힘조절이 남다른데 왜 점수를 적게 놓고 칠까? 의심병은 남들과 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게 만든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저 그 점수 때에 맞는 고만고만한 치수였다. 이런 상황이었구나. 그래서 네티즌들이  '그분이 오셨구나.'라는 농담을 하였구나.


그분은 주로 초면끼리 부딪칠 때 오시는 것 같다. 서로의 전력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긴장감이 충만해서 그럴 것이다. 반반의 확률로 우리에게 울고 웃는 경계를 그어주는 당신. 그분을 반갑게 맞이했던 님은 미소를 머금게 되고 성질 급한 님이 당할 때면 곧장 말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기당구 아니냐고. 당사자는 둘러댈만한 변명거리도 없다. 자신도 그분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잘 맞는다며 놀란 표정만 지을 뿐이다


플루크 한 방에 그분이 오실 때도 있다. - 어쩌면 그분을 부르는 신호일지 모른다. - 터졌다 싶으면 눈빛부터 달라진다. 괜스레 비웃기라도 한다면 한 대 맞을듯한 기운마저 감돈다. 폭탄은 언제 터질지도 모른다. 다득점 후 표정에서 안도감이 비칠 때면 풀이 죽어 따라갈 맛도 안 난다. 한참을 이기고 있다가도 '쾅'소리가 날 때면 난데없이 불안감이 몰려오기도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근접하게 쫓아오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한 점 차이로 역전당하기라도 한다면 어디 얼굴 둘 곳도 마땅치 않다.


내게도 그분이 오시려나 마음 다독이며 투지로 무장해 보지만 인연은 좀처럼 맺어지지 않는다. 성향이 어떻길래 사람마다 차별하는 것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눈에 띈다면 술 한잔 거하게 대접해서라도 그분을 모셔오고 싶지만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궁금하면 오백 원이라고. 음료 한잔 건네며 '어찌 그리 잘 칠 수 있냐'라고 물어도 보지만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는 못한다. 나도 모르겠다는데 거기다 대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경기가 시작되고 큐 질 하다 보면 느낌이란 녀석이 찾아오게 된다. 잘 맞을 것 같다든지, 어깨가 뻐근하다는 뭐 그런 감정의 기운들이다. 거기에 운이 더해지는 승부의 과정은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펼쳐지게 된다. 눈 감고 치는 포지션을 살수한다든지, 플루크로 황당하게 득점해 버리는 악운과 행운은 매 순간 도사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상황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듯 그분이 언제 오실지도 모른다. 우연찮게 다가와서 혼을 빼놓고는 누구에겐 야속한 님이 되어 훌쩍 떠나간다.













작가의 이전글 삐져있는 당구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