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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Aug 16. 2024

空享(공향)

당구장에서 ~ 56

내가 일하는 공장의 터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져 있다. 사계절과 아우러져 사노라면 흐르는 시간을 눈치챌새 없이 내일의 해가 뜨곤 한다. 모인 해가 365개 쌓일 때면 365번째 달이 짐과 동시에 또다시 닮은 해가 뜬다. 그 모습 한결같은 흐름이지만 첫 해와 마지막 해는 은근히 우리에게 소중함을 전해주려 한다. 의미를 받들며 하나둘씩 아도 보지만 바쁜 일상으로 몇 개인지 까먹기 일쑤다. 그러다 300개가 넘어갈 무렵이면 일부러 챙기게 된다. 거울 보면서 말이다.


둘려진 가운데로 개천이 한가롭다. 뻘 속에 붕어와 잉어 · 장어 · 게 등 민물에 있을 종들이 다들 뻐끔거리기에 오리 떼와 학은 제 집인 양 장난질하기 바쁘다. *간간히 고양이들이 나도 끼워달라며 의도치 않게 온몸을 적셔보지만 일생의 한 번이 되고 만다. 바위틈의 수달은 인물값을 해서인지 얼굴 보기 힘들다. 개천을 경계로 누워 있는 농삿길은 끝이 안 보일 정도의 긴 다리를 자랑한다. 그래서인지 자전거가 내 길이라며 시샘하고 있다. 질투심에 나도 따라 달린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중에서 유독 내게 친근감을 보이는 아지메가 있다. 내가 출현하면 숨었다가 나타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많이 부딪친다. 모자와 마스크 그리고 선글라스를 착용하기에 얼굴은 모른다. 멀리서 생김새로 알아채는 사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눈빛이 마주치면 어김없이 내게 인사를 건넨다. 뒤늦게 고개 숙이는 게 억울하기도 하고 당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이젠 내가 먼저 인사를 서두르게 된다. 그러다 방심한 틈을 타 타이밍을 놓칠 때도 없잖다.


한날 멀지 감치 아지메가 보인다. 자전거를 멈춰 세우더니 개천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인지하며 가까워지자 개천을 보라며 손짓한다. 여러 마리의 큼지막한 잉어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먼발치의 오리 가족을 곁눈질하는 눈치지만 오리는 관심 없다는 듯 기차놀이에 열심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정과 언어로 표현하며 이런저런 담화가 이어지더니 슬그머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불교에 심취한 세월이 30년이라고 한다. 끝장 봤다는 소리를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서인 것 같았다. 그 맘 충분히 이해했다.


서로의 목적지가 다르기에 자전거를 타면서 대화가 이어지는 것도 잠시 갈림길에 들어섰다. 지금이라는 물음에 나름의 깨우침이라는 모호함을 던져주고서 페달을 힘차게 밟아버린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을 허공으로 날려야만 했다. '나도 평생토록 당구에 목멘 사람이다.'라며 말문을 이어 보지만 들을 리 없다. 당구의 깊이를 모르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함을 아지메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까, 궁금함은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예전에 당구가 불교와 닮는다는 짧은 글귀를 담은 적이 있다. 당구를 대하는 자세에서 불교의 고요함을 더해보자는 의미였다. 물론 잘 치기 위한 기운을 얻기 위함이다. 운이 없다는 가정하에 동등한 실력에서 우위를 가늠 짓는 잣대는 의식과 욕심의 크기에서 판가름 나게 된다. 버리고 비우는 일을 감히 얄팍하게 여겨 불교에 빗댄 행위 자체를 지적한다면 이렇다 할 변명이 없다. 비워야 잘 칠 수 있는 조건이 생성되는 의미의 최종 목표는 결국 돈과 욕심이 따르기 때문이다.


아지메의 깨달음이 궁금하다. 어쩌면 空(공)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버릴 수 없는 내면의 승부욕을 두고서 비움을 끌어와 대리만족하려는 정체는 나약한 이중성에 불과한 것일까. 위선과 회피라는 얄팍함을 떠올리며 사전을 찾아보게 만든다. '空享(공향)'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비움의 중국어다. '여백을 누린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실천하기 쉽지 않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오늘도 당구장을 향하는 내 발걸음, 마치 최면 걸린 모습이다.




*고양이의 사냥본능이다. 한 번 빠져 식겁한 후 다시 뛰어들 생각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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