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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8. 2023

사나이의 뒷담화

당구장에서 ~ 42

세상 모든 술자리는 뒷담화를 위한 특별한 장소가 아니었던가. 안주와는 별개로 술맛을 돋우기도 하는 뒷담화. 특히 당구장 인연으로 마시는 술과 소리는 언제나 달콤하고 요란했던 기억이다. 영업을 마치고 술 한 잔 나누는 즐거움에 시곗바늘도 서두르고 있다. 단골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술판은 친분이 돈독해지는 계기를 마련함이 크겠지만 부담 없는 사이가 서먹해질 때도 없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자리를 고수하려는 한마음이 애당초 염두에 둘 생각을 않는다.


떡볶이 가게 쥔장은 초저녁부터 술판을 기다리며 당구 치느라 여념이 없다. 보나 마나 어묵 꼬치 끼우는 일을 마누라한테 맡겨두고 왔을 것이다. 무르익을 무렵 찾아오지나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든다. 깽판을 놓은 이력 때문이다. 현수는 제대한 지 일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백수다. 일도 안 하고 허구한 날 당구만 친다. 치과의사 박 선생은 시스템에 한창 빠져있어 매일같이 찾는다. 밤에 한잔하러 오시라 하니 고개는 끄덕이지만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 마칠 때가 다 되어서야 삼류배우 영식이도 왔다. 맨날 뜰 수 있다며 노래를 부르지만 그 소리를 몇 년째 듣는지도 모르겠다.


술은 당연히 소주요 안주는 그때그때 다르다. 주로 삼겹살을 많이 구워 먹었다. 초크 가루 · 카펫 먼지 · 담배 연기를 쉴 새 없이 마셔댔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선호하게 되었다. 내장 속 먼지를 제거해 준다는 통설이 무너진 것을 진즉에 알았지만 왠지 믿고 싶지 않았다. 자주 먹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으면 때를 기다릴 필요조차 없었다. 이른 감이 있어도 단골들이 먼저 이해한다는 눈치다. 넉살 좋은 손님들은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한잔 얻어 마시기도 한다. 치다가 마시기를 반복하더니 이윽고 눌러앉아 버린다. 급기야 당구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더라도 한잔 걸칠 수만 있다면야 형식적인 세팅은 중요하지 않았다. 당구장에 변변한 테이블이 있을 리 없다. 기껏해야 음료수 얹어놓고 짜장면도 겨우 올려놓는 크기라서 대충대충 테이블 될 만한 것을 붙여두고 탁자 모양을 낸다. 안주며 소주잔을 나른다. 화장실 구석에 처박혀 있는 보조 의자를 챙겨 오는 일은 언제나 막내 담당이었다. 소주가 떨어져도 냉큼 달려가야만 했다. 그래도 좋은지 술판이 벌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술도 마실 줄 모르면서 말이다.


테이블이 좁아서 소주병만 애꿎은 신세가 됐다. 바닥으로 테이블로 오르락내리락거리더니 머릿수보다 많이 쌓여만 간다. 한참을 마시다 보니 너의 잔인지 내 잔인지 분간이 안 된다. 찌개 데우는지 숟가락을 끓이는지 여러 개의 숟가락이 달궈지고 있다. 나무젓가락은 주인이 사라진 지 오래다. 개중에 술이 좀 덜 취한 사람이 술잔 주인 찾아주기 바쁘다. 술판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여러 분야의 직업인이 모여든 술판은 얘깃거리가 많다. 그날 주제는 때마다 다른 안주처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말문을 끄집어낸다. 말꼬리는 건배로 터치되어 다음 사람에게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를 반복한다. 당구 얘기로 전환되면 몽롱한 기운으로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당구에 관한 지식을 각자의 아집으로 두서없이 풀어내지만 고수의 말 한마디에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술은 용감함을 드러낸다고, 고수의 조언에 첨언하거나 반문하는 무례함으로 또다시 난리 통이 이어지기도 한다. 듣고 보면 모두가 맞는 말이다. 단지 얽히고설키고를 반복할 뿐이다. 마침내 혀가 덜 꼬인 사람이 승자가 된다.


해롱해롱 심드렁한 표정은 제각각이다. 취기가 살살 오르는 모습을 보아하니 누군가의 앙금이 나올 모양새다. 마지막 한 병을 감췄어야 했는데, 꼬인 혀로 심정을 읍소해 보지만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쌓인 앙금을 이해심과 배려로 풀기보다는 뱉은 말로 모든 것을 소화시켜 버린다. 연신 ‘나 술 안 취했다’를 반복하고 있다. 술판이 끝날 때가 됐나 보다.


사나이 앙금이 뭐 거창하고 큰일이라도 날 것 같지만 너무도 사소해서 여자들의 귀에 들어갈까 봐 조심스럽다. 때로는 치고받기도 한다. 설사 조금 과하더라도 지나고 나면 만남을 기약하고픈 무언의 약속이 된다. 의사가 당구장에서 찢어진 천을 짜깁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경찰과 당구 쳐도 *‘뽀록’(재수) 쳤다고 잡아가질 않는다. 큰 속임이 없는 한 인생사 별것이 없는 인간들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더러는 잘난 행세와 고점자의 건방짐도 있지만 이도 세월이 지나면 웃고픈 사나이의 뒷담화로 메아리친다.




* 플루크(fluke) : 운 좋게 공이 맞아 점수를 얻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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