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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8. 2023

밴댕이 소갈딱지

당구장에서 ~ 41

아무래도 밴댕이 소갈딱지로 닉네임을 지어야 할까 보다. 하수들이 한 수 배우겠다며 덤벼들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겠다. 이겨먹기 놀이다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이를 물고 덤벼드는 모습에서 배우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소문난 짠돌이라면 긴장이 배가된다. 내가 이기려면 견제구를 적절하게 섞어가면서 파이팅을 외쳐야 하는데 그러기엔 경기 운영이 여간해서 쉽지 않다. *한 수 배우겠다며 예의로 인사말을 건네받았건만 죽자고 덤벼들 기세다. 견제까지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러다가 하수가 이겨버리면 웃지 못할 장면이 연출된다. ‘잘 쳤습니다.’라는 말은 그나마 다행이다. '잘 배웠습니다.'며 정중하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면 절제된 감정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고수는 한 수 가르쳐주면서 게임비용까지 지불해야 하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자주 얼굴 부딪치는 사이라면 치기 싫은 내색도 못한다. 대적할 선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경기 치르는 날이면 출발부터 짜증이 몰려온다. 원하는 만큼 제 실력도 나오기 힘들거니와 난구 포지션을 풀려다가도 멈칫거리게 된다.


열심히 치는 것도 좋고 한 수 배우겠다는 의지도 올바른 자세임은 부인할 수 없다. 주머니 사정으로 승리 욕이 불타오르는 것도 얼마든지 웃어줄 수 있다지만 의도적 견제구가 날아올 때면 눈앞이 멍해지기도 한다. 내가 왜 치고 있냐는 자괴감마저 들 때도 있다. 어딜 가더라도 이런 유형이 존재하며 주로 점수를 짜게 놓는 것이 특징이다. 허구한 날 당구장에 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상대 선수가 자기보다 낮은 점수 거나 만만하다면 설렁설렁 치면서 장난치는 모습도 엿보인다. 당구장 주인은 이런 상황을 잘 알면서도 먼 산 쳐다보기 바쁘다. 매상을 올려주는 단골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고수와 치고 싶지 하수와 치고 싶지 않다. 내 입 맛에 맞는 경우가 없듯 어쩔 수 없이 주인의 매칭으로 경기를 치르게 된다. 이 때 대충대충 친다는 소리 들을까 봐 엔간하면 진지함을 유지하려 애쓴다. 가능하면 1승 1패의 성적을 의도하려는 마음이 앞선다. 하수가 고수 이겨 먹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기꺼이 영역의 침입을 허용하면서까지 스트로크에 자신감을 주고 싶은 이유도 숨어있다.


한 날 10점씩이나 아래 점수인 하수가 결승전을 치르자 한다. 이럴 땐 참 난감하다. 치기 싫은 내색도 않고 열심히 쳐 줬건만 만만하게 본거다. 가끔 이런 경우가 발생하여 사람 속을 뒤집어놓기도 한다. 당황하여 얼굴 붉히면서 ‘기회 되면 다음에 합시다.’라며 미련을 남겨줘 버린다. 머쓱한 표정이다. 몇 번 당하다 보니 대처할 요령이 생겼다. ‘제가 간이 너무너무 작아서 결승하면 새가슴이 됩니다. 죄송합니다.’라며 정중하게 고개 숙여 버린다. 그들도 미안했던지 따라 고개 숙이는 척한다.


그 후로 친분이 유지되어 다시금 시합하게 되는 날이 있다. 평상시처럼 ‘한 수 배우겠습니다.’ 또는 ‘열심히 치겠습니다.’라며 겸연쩍은 웃음과 함께 인사를 주고받는다. 묘한 기운이 주위를 감싸려 한다. 불편한 감정을 빨리 수습하기 위해 먼저 농담으로 응수해 버렸다. ‘배운다면서 또 이겨 먹게?’ ‘열심히 안 쳐도 된다. 대충대충 쳐라.’ 키득키득 웃음보를 남발하며 게임이 시작된다.


마주하며 웃음으로 시작된 뱅킹에서 하수가 서두르는 기색이 역 역하다. 지난 잘못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임을 알아챘다. 굴러오는 공을 곁눈질하자 비실비실 오다가 만다. 내가 선공을 쥐었다. 마음속으로 파이팅 외치고는 ‘너 오늘 혼나봐라.’라며 멋있게 샷을 날렸다. 웬 걸 어이없이 득점에 실패해 버렸다. 하수가 타석에 들어선다. 웃음 참고 있는 모습이 왜 이리도 얄미울까.


경기 끝낸 후 이런저런 농담을 건네던 차 엇비슷한 지점의 동호인이 끼어든다. 주고받는 예기를 들은 거다. "고수 이겨먹는 스릴로 당구 친다."며 말문을 열자 나와 함께 친 친구가 이내 맞장구치고 있다. 덧붙여 "하수하고 치면 재미도 없지." 라며 말꼬리가 이어지니 서로 키득거리며 고개 떨구기 바쁘다. 어이없어도 웃을 수밖에 없는 한국의 당구문화, 근질거리던 입을 털어야만 했다. '그럼 나는 무슨 재미로 당구 치냐?'라고 물었다. 머쓱한 표정 짓더니 둘이 약속이나 한 듯 먼산만 쳐다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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