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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8. 2023

죽돌이의 일상

당구장에서 ~ 40

여유로운 시간은 고민할 틈 없다. 당구장을 향한 발걸음을 쳐다보며 죽돌이의 습관이 무섭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오늘은 희로애락의 어떤 감정이 내 곁에 다가오려나. 나보다 조금 치수가 낮은 중수와 매칭되었다. 서로의 목례로 인사를 나눈 후 선공을 쥐기 위한 기싸움의 신경전이 펼쳐졌다. 초구는 첫 득점을 거저먹는 것과 같아서 *뱅킹을 신중하게 쳐야 한다. 웬만해서 놓칠 수 없는 포지션이 기다리고 있기에 시작부터 심리전이 전초전인 셈이다.


타격자세를 취하는 순간 중후함이 상대를 압도한다면 선공 얻을 확률이 높다. 상대는 내가 고수임을 의식했는지 한 뼘 차이로 선공을 쉽게 내줘버린다. 사뿐하게 엎드려 가벼운 마음으로 초구를 쳤다. 아슬아슬하게 수구가 적구를 비켜 간다. 이상하다. 아무래도 게임이 편안하게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기운이 몰려왔다. 다행인지 다음 타석도 손쉽게 칠 수 있는 포지션이다. 그런데 웬걸, 가볍게 큐를 날렸지만 황당하게 놓쳐버리고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무 심기가 화근이었다. 삽질을 된통 해 댄 통에 팔 근육이 무진장 뭉쳐버린 걸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보통 한 게임에 길어야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한 시간 반이 되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상대가 좀 더 잘 쳤더라면 이렇게 지루한 과정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단지 고수라는 이유로 주눅만 잔뜩 들어 있는 모습이다. 겨우겨우 끝내고서 연거푸 한 게임을 더 쳤다. - 두 게임은 기본 예의기 때문이다. - 또다시 첫판과 같은 모양새로 이어지는 후반부의 꽈배기다. 속내는 이 장면이 아닌데 팔이 움직여주질 않으니 이 일을 어쩔꼬.


고민 끝에 돌파구를 찾고자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생각대로 게임이 풀리지 않을 때는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긴장감을 날려 보낸 후 상쾌하게 다시 출발했지만 여전히 지루함이 이어진다. 서로 칠 생각 않고 눈치 보기에만 급급하다. 돈 나가는 소리만 듣고 있는 셈이다. **게임당 상한제가 적용되는 구장이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시간이 곧 돈”이라는 구태적인 당구장의 생리를 직접 실천하는 ***10분당 요금제이기 때문에 갑갑함만 몰려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트레스라는 괴물 딱지가 머릿속 저장고에 쌓여만 간다. 게임이 끝나면 모아둔 괴물 딱지만큼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서로의 모습. 이 땅의 당구문화를 지탱해 온 힘의 원천이기에 어디 원망할 곳도 없다.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냥 져 버리자. 어차피 놀러 왔으니 한 푼 더 내어버린다고 생각하자.’ ‘그래도 승부니까 일단은 이겨보자.’ 숨어있는 인간의 승리욕이 갈피를 잡고 있다. 어쨌든 이겨도 찜찜한 시합을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패자는 피 같은 내 돈이 사라짐은 물론이며 괴물 딱지를 잠잘 때까지 머리에 이고 자야 할 판이다. 이런 상황을 너무도 잘 알기에 빨리 끝내보려 애써보지만 이것도 욕심인지 어깨에 힘만 잔뜩 실리고 있다. 상대의 눈치를 보아하니 같은 생각임에는 틀림없다. 하다 하다 아예 포기한 듯하다. 초조함을 어찌 해결해야 하나, 방법이 없을까.


도저히 이대로는 진행이 힘들어서 타협의 조건을 걸어야만 했다. 혹시 이긴다면 게임비용을 보태겠노라고. 상대도 겸연쩍게 웃으며 죽겠다고 한다. 미소로 답해주니 다행이었다. 한결 어깨가 가벼워진 듯 스트로크에서 편안함까지 엿보인다. 자주 보는 사이라면 농담으로 달래면서 밥 한 끼로 얼마든지 해결될 문제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둘째 판도 이겼더라면 귀가 가려워 밤잠까지 설쳤을 것이다. 그날뿐이겠나. 온갖 쌍스러움을 더해 두고두고 와전시켰으리라. 공도 못 치면서 시간 질질 끄는 재수 없는 놈이 있다고 말이다.




* 둘이 동시에 상대편 단 쿠션을 맞춰서 되돌아오는 단 쿠션에 근접한 공이 먼저 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 게임당 상한제 : 한 게임당 최고 금액을 미리 정해두는 요금제도.

*** 10분당 요금제 : 시간이 지날수록 요금이 늘어나게 되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제도이다. 당구문화의 한 단면이자 실력의 평준화를 방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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