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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Feb 18. 2024

당구시계

당구장에서 ~ 52

거의 모든 스포츠의 종착지는 국가 대항전이 아닐까. 화합 · 평화 · 행복을 앞세워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며 이를 극복하는데 중점을 둔다고 한다. 정당하게 싸워서 다투지 말고 다 함께 잘 살자는 뜻인지, 싸우지 않고 잘 살면 안 되는 것인지, 이념의 퍼즐을 끼워넣기 위해 굳이 싸우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닌지, 아무튼 집 밖에로 나가는 순간부터 세상과도 싸워야 하는 우리네 인생사다. 이 모습에 당구가 뭐라 손짓하지만 지구는 듣고도 못 들은 채 제 할 일만 한다.


총 들지 않은 전쟁이 스포츠라면 여러 견이 모이겠지만 너와 나의 다툼으로 스포츠가 탄생한 배경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지 싶다. 축구를 보더라도 여실히 느껴진다. 축구가 발로 뛰는 전쟁이라면 당구는 칼로 찌르는 각개전투를 상상케 한다. 더해서 *최초로 국가 간의 스포츠라는 수식어도 따라붙는다. 서로 다른 국가가 큐를 들고 가장 먼저 경쟁을 펼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기사도 정신과 서유럽의 지리적 조건이 우선되지만 무엇보다도 늘 인간의 곁을 지켜왔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싶다.


유럽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양으로 전파되었을까. 중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갔을까. 고고학적 근거는 없지만 현대 당구의 뿌리는 유럽에서 출발한다. 인류는 실크로드 사막 어딘가에 숨어 있을 당구의 흔적을 뒤로한 채 서양함대가 바다를 갈라버렸다. 선원들은 당구로 무료함을 달랬을 것이다. 침략의 도구로 쓰일 운명이란 것을 알기나 했을까. 일본과 한국 등 스쳐간 거의 모든 나라에 침투하여 인간을 유혹해 버린 것이었다. 아울러 서양문명의 발전으로 그 혜택을 받아 진화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싸움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같지만 다름으로 포장하여 싸우는지도 모른다. 대항해시대를 끝으로 갈라놓은 지구의 국경선 아래 나와 다른 피부색과 너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총을 든 원죄 때문일까, 스포츠를 앞세워 서로를 토닥거려 주지만 그 모습 왠지 부자연스럽다. 선을 넘는 순간 다시 싸워야  운명에 처한 국경 안의 사람들. 너도나도 서로에게 힘을 과시하는 가운데 당구도 옆에서 거들고 있다.


한때 유럽과 아시아로 나누어 다투기도 하였다. 서유럽과 **튀르키예선수들이 한 편에 서고  한국과 베트남선수들이 아시아에 속해 항전을 펼쳤던 것이었다. 단 두 번으로 그쳤지만 인종을 구분 짓는 놀이 그 이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첫회에 유럽이 우승하자 짓눌렸던 감정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기량 차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내 눈에는 침략국에 맞서는 약소국의 항쟁으로 비쳤던 것이었다. 두 번째 대회는 다행히도 아시아가 승리했다. 세 번째를 예고했으나 한국의 프로당구 출범으로 선수들이 이탈하는 바람에 무산된 상황이다.


프로당구, 흥행할까라는 우려와는 달리 돛을 활짝 펴고 순조롭게 항해하는 듯했다. 나비넥타이를 풀고 조끼를 벗어던졌다. 구두도 벗자 큐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해외선수들을 영입하여 흥행몰이를 시도했지만 딱 그만큼의 관중으로 달러가 유출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월등한 기량으로 무장한 유럽 선수들을 저지한다지만 수시로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에서 자괴감마저 들었다. 와중에 서유럽 국적의 최다 우승자가 이탈하자 그나마 한국선수들이 목마름을 적시고 있는 상황이다.


총칼로 무장한 서구의 침략에 당하기만 했던 유색인들의 욕망에서인지, 고대 부흥을 되찾으려는 욕심에서인지는 모른다. 한국의 아프리카 Tv는 당구 중계를 시작했고 프로당구는 해외투어를 준비 중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스포츠 이벤트를 자랑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당구대회를 공식화했다. - 스누커와 포켓 중심이지만 머지않아 3쿠션도 포함되리라 믿고 싶다. -  중국은 만리장성의 명성답게 세계 최초로 당구복합단지를(박물관 · 스포츠센터 · 명예의 전당) 구축한 지구촌 당구환경이다.


당구가 꿈꿔왔던 이상이 실현되는 마당에 꿈나무들의 유입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일본에게 당구를 전수받았다고 저출산과 고령화마저 닮고 있다. 아니, 더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남아있는 젊은 세대도 외면하는 추세다. 우리도 그랬던 것처럼 좀 덜 사는 나라는 아무래도 당구 인구가 많다. 베트남이 급부상하는 지금, 아시아의 거대 자본이 당구를 움직이려 하는 이 시점에서 흥행의 다음 배턴을 어느 국가가 이어받을지.  


서유럽의 막강한 선수들이 한국으로 건너와 프로당구에 합류하길 바랐지만 결국 제나라 정통성을 고집하고 말았다. 아마도 복지와 민족이라는 자긍심이 뒷받침되지 않았을까. 한국의 프로당구가 얼마만큼 세력을 넓힐지는 미지수로 남긴 채 UMB 홈페이지 첫 화면은 중국의 당구박물관으로 커다랗게 장식해 버렸다. 지정학적으로 좋은 땅에 위치한 이탈리아는 낭만 스트로크로 예술을 지향하는 모습이다. 저지대 국가 네덜란드는 이겨야 하는 본능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 당구시계는 오늘도 돌아간다.




* 1870년대 세계 선수권 대회(World Billiards Championship)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세인트 제임스 홀'에서 자료를 찾을 수 있다.

** 튀르키예의 모호한 위치는 유럽의 편에 서게 만들었다.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세미 사이그너'선수 덕분이었을까, 기독교와 유대교의 절대 성지가 가까워서인지. 당구의 뿌리를 파헤치다 보면 언제나 그 주위를 서성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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