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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나를 기다렸던 것처럼 내리는 눈이란.

포근하게 쌓이는 걸까

by 도쿄키무상

지난 새벽 화장실을 가려고 나온 나는,

그날따라 유난히 밝은 집을 보고는, 의아함을 갖고 거실로 향한다.

거실로 향하는 짧은 몇 발자국 끝에,

나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의 감탄을 내뱉는다.


’ 눈이다 ‘

어둠에 익숙해져 많은 형상을 담지 못하는 눈으로 나는 그 존재들을 확인한다.

밖은 세상을 가득 채울 기세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외롭게 새벽을 안내하던 가로등은

흩날리는 눈을 발판 삼아 어느샌가 우리 집까지 밝히고 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녀석들은 기어코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내가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잔 간밤동안 많이도 애썼구나.

덕분에 집에서 나가지 않을 핑곗거리가 생겼으니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그런 녀석들은 땅에 다다르기 위한 힘을 다했는지 정오를 넘겨서야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에는 본인의 차례가 왔음을 직감한 태양이 그들을 향한 조명을 비추기 시작한다.


이런 태양과 눈의 합작은 나를 밖으로 불러내는 듯했다.

오전에 전한 감사의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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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옷을 벗긴 건 태양이라고 했던가,

나의 옷을 입힌 것 또한 태양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주연은 아니지만 말이다.



단단히 채비를 하고는 나름의 산책코스를 차근차근 밟아나간다.


눈이 내리고 녹은 자리를 얼음들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채운 상태.

평소보다 더 많은 힘을 들인 산책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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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책길의 반환점은 집 근처 저수지.

지역을 대표하는 거대한 산의 수많은 길중, 이름을 부여받은 어엿한 등산로 초입구이기도 한 곳이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가볍게 물가 정도만 걷는 정도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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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으로 향하는 길에 다시금 녀석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임을 알리기에는 충분한 정도의 눈이 소복이 쌓였고, 사람이 다니는 저마다의 길은 모양을 내어 길게 늘어져있는 상태였다.

모든 것이 갖춰진 이 상황에서, 내리는 눈은 얌전한 어린아이 와도 같다.


그러한 것들은 마치 나에게로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집에서 나와 분명 본인들을 찾아 줄거라 믿었던 것처럼.


나는 이 녀석들을 반겼다. 너희를 찾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물론 오전까지 집을 나오지 않을 좋은 핑곗거리라고 말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나에게로 달려오는 것들을 바라보며 스쳐간 나의 인연들만 같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녀석들을 시각화하거나 의인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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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마치 내가 찾아다녔다는 듯 당연하게 마주쳐,

끝내 나에게 다다렀을 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나의 인연들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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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다가와 따뜻한 흔적을 남기고, 결국 녹아 사라지는 것들이 지나간 인연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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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함을 선사해 준 것들이 내게 닿아 나를 차갑게 하더니,

끝내 녹아 나의 신발을 더럽히는 게 지나간 인연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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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이렇게 녹아 사라질 거면서, 어째서 온 힘을 다해 나에게 다다렀나 싶을 때,

주위를 둘러보니 포근히 쌓인 녀석들로 가득했다.


마치 머물러 있는 인연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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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또 저것들은 녹아 또 내 신을 더럽히겠지 싶은 생각을 할 때쯤,

진흙 뭍은 내 신발을 씻겨내고 있었다. 녀석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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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줄 모르고 네 탓을 하는 이 순간,

지독하리만큼 나의 인연들과 닮아있는 너희들은 여전히 나에게 다다르고 있었다.


쓸 때 없이 아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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