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부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명작 괴물을 늦게나마 보게 되었다.
23년도에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는 소식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아시아 영화의 빛이 되어준 영화로도 소개된다.
영화를 본 소감부터 말하자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희열감과 감동을 받았다. 훌륭한 하나의 예술작품을 봤을 때의 그 희열감을 말한다.
‘사카모토 류이치’ 선생의 음악을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영화 이전에 'Aqua'라는 음악으로 먼저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게 된 계기 또한 음악을 깊이 있게 듣기 위한 장치 정도로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큰 기대가 없어서일까, 영화가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나는 큰 충격을 넘어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었다.
영화 엔딩부에서 흘러나오는 'Aqua’를 들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껏 들어왔던 'Aqua'는 반쪽이 채 되지 않았던 음악이라는 것을 말이다. 음악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영화다.
아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보고자 한다.
괴물은 누구인가
영화의 제목이자 이야기의 큰 흐름을 결정하는 단어, ‘괴물’이다.
영화는 엄마 무기노 사오리의 시점을 시작으로 담임 선생인 호리 미사키의 시점까지, 관객들로 하여금 괴물을 찾는데 시선을 집중시킨다. 아들 미나토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학대를 당한다고 생각한 무기노는 호리 선생을 결국 학교에서 추방시키는데 성공한다.
평생을 수동적인 인물로 살아온 호리선생은 음침한 분위기로 남들에게 오해를 사지만, 나름의 신념을 가진 좋은 선생이 되고 싶어 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 속에서 조금씩 오해와 함께 어긋나버린 그의 삶을 보고서 관객들은 괴물로 확신했던 인물의 이면을 보고 당황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부인 주인공 미나토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자 비로소 관객들은 괴물은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오히려 진정으로 괴물인 이지메를 선동하는 동급생들과 호리 선생에게 모든 사건을 책임을 전가한 교장을 비롯한 학교, 그리고 요리라는 어린 소년을 학대한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이점에서 영화는 깊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쫓기 바쁘다.
영화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영화라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 너무나도 잔인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점이 굉장히 뼈아프고 시렸다.
결국 이 영화에서 괴물은 극 중의 주인공들이 아닌, 이를 바라보는 사회와 그리고 우리들이었다.
제 1막
엄마 ‘무기노 사오리’의 시점
영화는 주인공 미나토의 엄마 ‘무기노 사오리’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사고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무기노는 누구보다 씩씩하게 아들을 키워내는 엄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아들에게 이상한 징후가 보이자 무기노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아들 미나토는 담임 선생인 ‘호리 미사키’의 짓이라 그녀에게 밝히고, 그녀는 학교를 찾아가 담임에게 책임을 묻고 끝내 그를 학교에서 쫓아내는데 성공한다.
언뜻 보면 씩씩하게 혼자서 아들을 키워내는 엄마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서 다른 감정을 느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녀는 아들의 문제들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만, 정작 미나토와의 진심 어린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다.
늦은 밤 미나토를 터널에서 발견하고서 집으로 데려오는 길, 그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아빠와 약속했어, 네가 너만의 가족을 꾸리고 살아갈 때까지 너를 잘 키워내겠다고”
분명 이 말은 아들 미나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담긴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아들을 위하는 말이 아닌 본인 스스로에게 전하는 다짐이자 죽은 남편에게 전하는 약속과도 같다. 실제로 아들 미나토는 엄마 무기노의 이 말을 듣고 더 자책하고 괴로워한다. 그녀의 사랑 방식이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사랑이 아들 미나토를 더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틀림없다.
어쩌면 그녀는 진정으로 아들을 위함이 아닌 본인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런 엄마로서의 모습에 스스로는 더 중점을 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빠의 부재가 있는 아들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편모 가정이 사회적으로 비치는 모습, 그리고 그 속에서의 본인의 역할에 그녀는 충실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그녀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만은 않다, 그저 인간사에 있을 수 있는 안타까운 비극이지 않을까.
제 2막
선생 ‘호리 미사키’ 의 시점
1막에서 극의 괴물로 비친 호리 선생의 시점으로 2막이 시작된다.
영화 초반부에 호리 선생은 그저 음침하고, 시내 걸스바에 다닌다는 소문이 도는 등의 좋지 못한 선생으로 찍힌다.
2막에서는 그런 호리의 억울한 시선들을 뒤바꾸는 이야기로 전개가 되었다.
실제로 그는 주인공 미나토를 학대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아이들을 위한 어른이기도 했다.
미나토와 더불어 또 다른 소년 요리의 문제를 잠시나마 직면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인물에 대한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이유는, 그는 너무나도 수동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요리가 친부에게 학대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학급에서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떠나가는 연인을 붙잡지 못하고 문밖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지극히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가 된다. 호리 선생은 스스로가 억울하게 학교에서 쫓겨나는 순간마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나는 이 호리 선생에게서 나의 모습을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굉장히 억울하지만, 사실 억울할 것이 없는 방관자.
딱 그와 우리에게 어울리는 표현이지 않을까.
우리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삶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우리는 참견하고 싶지 않아 한다, 남의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태도를 가졌음에도 세상은 올바르게 흘러가기를 바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의 동료들이, 우리의 이웃이 그저 좋은 인간이기만을 바란다.
정작 우리는 좋은 인간이 아니면서 말이다.
호리 선생은 지극히 평범하지만 가장 잘못된 우리들을 비추고 있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제 3막
‘무기노 미나토’의 시점
영화의 마지막 부, 주인공 미나토의 시점에서 흘러가는 엔딩.
영화 초반부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던 이야기를 터뜨리는 시점.
결국 우리가 찾는 괴물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남은 건 두 소년의 진심 어린 사랑과 순수함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이유 모를 눈물이 계속 흘렀다.
이 눈물은 더 이상 가지지 못할 잃어버린 나의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과, 어른임에도 지켜주지 못한 두 아이의 삶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그저 빛나는 두 아이에 대한 경외로움이 담긴 눈물이다.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결국 영화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중심에는 주인공 미나토가 존재한다고, 이 아이로 인해 누군가는 직장을 잃고, 또 누군가는 아이를 잃는 상처를 받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모든 문제는 미나토의 거짓말로 시작이 된다. 우연히 발생한 일들을, 호리 선생의 탓이라고 거짓말한다.
이유는 다양했겠지만, 이 또한 한 아이의 순수함은 아니었을까.
요리를 향한 본인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아이는 스스로가 거짓말을 해도 이해할거라 생각한 호리선생을 탓하게 되었을 것이다.
럭비 선수였던 아버지를 동경하지만, 본인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할 거라는 확신에 죄책감을 느끼며, 엄마가 바라는 아들이 될 수 없고, 이 사회가 바라는 남자가 되지도 못한다는 마음에 그저 미나토는 요리와 함께 세상의 종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본인들은 이 세상에서 행복함을 느낄 수 없다고 두 소년은 확신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바라봐 주지 않은 어른인 우리들이 어찌 이 아이를 탓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저 두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갈만한 세상을 만들어 주지 못했음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이 세상은 그런 어른이 되어주어야만 한다.
그외
교장선생님
영화 속에서 미스터리한 인물로 묘사되는 교장선생이다.
그녀를 둘러싼 손녀의 죽음에 대한 소문과, 호리 선생의 무고함을 알고 있음에도 그에게 책임을 묻고 태연스럽게 자리를 지키는 냉혹한 인물이기도 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감독은 그녀의 시점에서 결국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
그녀는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괴물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우리 사회 시스템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생각한다. 관료주의의 상징이자 진실을 외면하는 이 시대의 어른들의 모습을 한 인물이 그녀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후반부에 미나토와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은 그녀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아이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변화해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품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저 사카모토 선생의 ‘Aqua’에 이끌려 그의 음악으로 끝난 영화.
두 아이가 나온 어딘지 모를 세상은, 고통도 괴로움도 죄책감도 없는 온전히 자신일 수 있는 세상일 것이라는 생각에,
두 아이의 미소가 진정한 행복에 다다랐음을 느꼈기에, 벅찬 감동을 느끼며 영화의 끝을 받아들인다.
몇 년 전부터 꿈이 있었습니다.
장래희망과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답하는 직업적 꿈이 아닌,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어느 순간 마음 한편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
영화가 끝나고 며칠이라는 시간 동안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리고 두 어린 소년이 느끼는 마음들이 제가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어른의 부재를 깊이 느끼고는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서로를 괴물이라 칭하고, 비난하는데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저는 때론 모두가 그저 겁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모두가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힘이 부치고 두렵기에 이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는 곧 우리 사회에 좋은 어른들이 줄어감을 뜻합니다. 먼저 나아가 길을 밝혀주는 어른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두려움이 별거 아닌 인생의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다정하게 말해줄 어른이 없음을 느낍니다.
제 스스로가 누군가의 삶을 밝혀줄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꿀 힘을 가진 그릇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 또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있음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인간이기에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자, 또 더 나아가 진정한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저에게 이 영화는 다시금 이 마음을 되새기게 한, 한편의 격려문이 되어주었습니다.
끝으로 좋은 영화 만들어주신 분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 선생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