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일에 떠오른 단상들과 한국문학 이야기
미국 현지 시간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이다. 며칠 전에는 꿈을 꿨는데 볼링공 하나가 뜬금없이 별안간 가슴팍으로 퍽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꿈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음에도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진짜로 아프기도 했다. 더 신기했던 건 그 때문에 잠이 깨서 일어났음에도 가슴에 통증이 있었던 것. 뭐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어 보니 옆에서 7살 조카가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나중에 조카의 말을 들어보니 꿈에서 자기가 삼촌 가슴팍에 박치기를 했단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는데 확실한 건 볼링공은 녀석의 머리통이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어젯밤. 그 볼링공이 꿈에 또 보였다. 이번엔 조카의 머리라는 걸 알아서인지 짜식, 잠버릇 하고는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암만 봐도 누가 봐도 저건 진짜 볼링공이었다. 헤밍웨이는 글을 쓰다 보면 X같은과 같은 욕을 써야만 하는 X 같은 경우가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일단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렸는데 이번에도 퍽 소리와 함께 떨어졌고 통증이 느껴졌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내가 침대에서 떨어져 있다. 창피하기 이를 데 없으니 어디 가서 말도 꺼내기 뭐 한 일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글쓰기 하는 건 또 무슨 일인가 싶고.
미국에 있으면서는 오랜만에 <뉴욕 타임스> 일요일 종이판을 봤다. 그 유명한 ‘북 리뷰’ 섹션을 비롯해 읽을거리들이 한가득인데 한편으로는 부질없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일본의 대표 지성인인 와타나베 쇼이치는 오래전에 <지적 생활의 발견>이라는 저서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종이신문 무용론을 주장한 바 있다. 종이 신문에 실린 정보들은 기본적으로 인터넷에서도 다 열람이 가능하고 중요한 내용들은 잘 편집되어 책으로 묶여 출간되기도 하기에 굳이 종이신문을 구독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이유에서다. 어쩌면 동병상련이라 여겼을지 모를 종이책에까지 밀리는 형국이라면 종이신문은 “너 참 불쌍타”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족이지만 “너 참 불쌍타”는 조선이 낳은 위대한 소설가 벽초 홍명희 선생이 <레 미제라블>을 번역할 때 내놓은 제목이기도 하다. 이렇게 대놓고 직접적인 제목은 이 또한 사족이지만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처음 번역 시도되었을 때의 그것이 내가 아는 바로는 압권인데 바로 <껌둥이의 설움>이었다. 직접적이기 전에 문제가 다분한 제목이긴 하지만 관련된 이야기들은 차후 준비가 되면 '번역본색'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번 미국 체류에서는 또 오랜만에 성당에도 나갔다. 유학 시절에도 계셨던 본당 신부님은 “성당에 꼬박꼬박 미사 드리러 오는 날보다 남을 위해 사는 날이 더 많아야 함”을 언제나 강조하신다. 훗날 생을 다했을 때 손발과 옆구리가 뚫렸고 머리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시는 예수님을 혹시라도 만나 “네가 아닌 남을 위해 살다 생긴 너의 상처 좀 보자” 하신다면 꿈에서 봤던 볼링공 따위랑은 비교도 안 되게 창피할 것 같다. 그렇다면 성당을 나와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을 뭐라도 해야 하겠지만 인간이라서인지 아니면 인간이 덜 돼서인지 이 놈의 몸뚱이는 늘 그랬었듯 그냥 서점으로 향한다. 미국 내 최대 규모 체인을 자랑했던 Barnes and Noble 서점도 이제 폐업한 곳들이 적지 않다. 성업 중인 곳들도 책들보다는 굿즈나 아이들 장난감이 서점 문을 열면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다. 함께 간 조카의 눈에도 당연히 마찬가지라서 녀석은 광분한다. 원하는 거 한 개는 사줄 수 있지만 그 하나만이어야 한다고 조건을 걸었더니 마음에 드는 거 몇 개를 펼쳐다 머리를 감싸며 고민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짠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약속을 지키려는 그 모습이 고마웠다.
미국 내 Barnes and Noble 서점에는 항상 스타벅스가 함께 있는데 거기서 커피랑 책이랑 즐기는 것도 물론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영어실력을 향상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거기 앉아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영어 학습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그렇고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카페에서 서로 나누는 이야기야말로 ‘생활영어’이자 ‘프리토킹’이니까. 그러다 다시 읽고 있는 책을 보면 그건 읽기가 되니 그야말로 청취와 독해를 같이 할 수 있는 셈이다. 막상 미국 와서 영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픈 방법이기도 하고.
미국 서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Romance 코너가 인기가 많다. 가볍게나마 읽어보면 정말이지 별의별 관계에서 ‘러브라인’ 물꼬가 트는구나 싶다. 단순 불륜이나 치정이라 보기엔 뜨악한 관계도 많다. 이를테면 장인어른과 사위의 연애도 있다. 요즘의 젊다기엔 어린 친구들은 모를 수 있겠지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르윈스키의 스캔들이 생각났다. 다른 장소도 아니고 어떻게 백악관에서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느냐는 추궁에 클린턴은 “솔직히 이게 그리 큰일이 될 거라 생각 안 했다”는 답을 지금 이 Romance 코너에서 책을 읽으며 키득거리는 클린턴과 비슷한 느낌의 아저씨를 보자 생각이 났다.
서점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이렇게 별스러운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난다. 이번에는 유학 시절 한국문학번역원과 교내 한국문학 센터 주최로 마련된 행사에 초청되어 방문했던 박민규 작가가 생각났다. 그는 한국소설의 위기를 ‘문학판의 우루과이 라운드’라고 진단한 바 있다. 한 마디로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수입 개방이 된 것이다. 경탄을 금치 못할 외국 문학들이 우수수 쏟아지는데 마땅한 무기가 없던 국내 문학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 이를테면 <장미의 이름>에 맞설 지적 추리나 세련된 현학,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맞설 고급스러운 관념적 유희, 그리고 현재 최신작 출간 소식으로 연일 화제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에 맞설 서구적 라이프 스타일 묘사를 내세울 국내 소설이 마땅치 않았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심각한 착각일 수도 있다. 발견을 못했거나 화제가 되지 않았을 뿐 언급한 외국 문학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을 국내 문학도 분명 있을 수 있기 때문. 또는 아무리 ‘가격’이라는 게 책정된 상품이라지만 문학을 그렇게 다른 상품들과 똑같이 비교하는 건 아니다는 식의 원론적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과 같은 흐름이라면 국내 소설은 계속해서 맥을 못 출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는 점이다.
박민규 작가는 우루과이 라운드 당시 농민들의 대응을 봤더니 신토불이를 내세웠는데 결과는 참패였고 다음으로 마땅한 대안이 없어 결국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했는데 국내 문학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이 또한 요즘의 어린 친구들은 낯설겠지만 오래전 국내 영화판에는 ‘스크린 쿼터’가 큰 화제였는데 쏟아지는 외국 영화들로부터 국내 영화들을 보호하는 차원의 움직임이었다. 당시엔 그런가 보다 하고 무덤덤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국내 소설가들에겐 부러웠을 것도 같다. 문학판에서는 그런 쿼터제 비슷한 말도 못 꺼냈을 테니.
아무리 잡문의 글이라지만 관련 당사자도 아니고 무엇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에 대해 떠드는 건 그만하고 그래도 마지막으로 희망찬 부분을 보자면 바로 여기, 브런치 스토리에 이야기되는 글들을 들고 싶다. 나름대로는 꼴에 미국물을 그래도 적잖이 먹은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인들에게도 충분히 먹힐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내 어쭙잖은 안목에도 분명 들어온다. 활발히 진행되는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도 그렇거니와 관련 움직임들이 앞으로도 꿈틀 하다 보면 세상을 향한 힘찬 발길질도 할 때가 있을 것이고 설령 헛발질에 그친대도 의미마저 헛되지는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