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할수록, 알수록 어려운 번역 세계
근래에 <인간 같은 동물, 동물 같은 인간>과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라는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더욱 확실해졌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여태껏 우리 인간이 소위 말하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물론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더 뛰어난 부분들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관점에서 마찬가지로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떨어지는 부분들도 있음 또한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동물들을 가리켜 ‘녀석’이라는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이는 번역에서도 해당이 되어 이번 <번역본색> 글머리에 먼저 언급해 본다. 악의 없이 쓰는 ‘녀석’이라는 표현은 결코 그 대상을 비하하는 것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동물들한테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자주 그렇게 쓰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기저에는 녀석이라고 말하거나 글을 쓰는 이가 그 ‘위’에 있음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이건 적어도 바람직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동물의 왕국>이나 그 밖에 동물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같은 걸 보면 이 ‘녀석’이라는 표현은 거의 항상 등장한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텐데 그 대상이 곤충이나 벌레일 경우에는 유독 두드러진다. 그리고 세부적으로 구분 지으려 하지도 않는데, 지난 <번역본색> 글에서 goose를 무조건 거위로 번역하는 오역을 지적한 바 있다. 같은 맥락에서 worm을 보면 무조건 벌레라고만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적지 않은 경우에서 goose가 기러기를 지칭하듯이 worm은 그냥 벌레가 아니라 ‘지렁이’를 가리킨다. 물론 지렁이는 earthworm이 명확한 명칭이지만 기러기인 wild goose를 그냥 goose라고만 많이 쓰듯이 지렁이도 worm이라고만 쓰는 경우들이 많다.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어떤 책을 보면서 친환경 농법 성공의 비법을 ‘벌레 공장’이라고 해놨길래 어떤 벌레인지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 지렁이였기 때문이 생각 나서다. 이는 필시 원문에서 worm factory로 되었을 부분을 곧바로 벌레 공장이라고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문 저자는 당연히 ‘지렁이 공장’을 의미했었을 것이고.
그런가 하면 올 한 해는 세계사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보고자 관련 책들을 보던 중 어떤 책에서 미국사를 언급하다 “미국 북부 애리조나 주”라고 된 부분이 눈에 밟혔다. 애리조나 주는 미국 본토를 놓고 보면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상당히 남쪽에 있어서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저렇게 “미국 북부 애리조나 주”라고 해버리면 별다른 부연 설명이 없는 한 독자들 중에는 분명히 ‘애리조나 주는 미국 북부에 있구나’ 생각할 이가 있을 것이다. 아마 “미국 애리조나 주 북부”를 뜻했을 것인데 이 정도는 사소한 오류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오직 번역된 말과 글로만 작품을 이해하는 독자나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 때문에 의도치 않게 큰 오해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코 사소한 부분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번역계를 너무 ‘디스’만 하는 것 같아 균형(?)을 맞추자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훌륭한 번역도 물론 있다.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라는 고전 영화가 생각난다. 버나드 쇼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인데 이집트로 쳐들어온 로마군을 피하려고 스핑크스 뒤에 숨은 클레오파트라가 하필 거기서 시저를 만나게 되고, 이게 둘의 첫 만남이 되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클레오파트라가 시저에게 말한다. “You are sentimental.” 번역된 자막은 “정이 넘치시군요.”였고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그게 그렇게 감탄할 만한 번역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나한테는 그랬다.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에 관해 하도 흉흉한 소문만 들어서 그를 아주 괴물 같은 인간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막상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아서 저렇게 말한 것이다. 특히 이런 영상 번역에서는 제한된 글자 수에 맞춰 번역해야 하기 때문에 그 고충이 출판 번역보다 더할 수 있는데 내가 알기로 저런 간단한 말 한마디 번역이 그중에서도 더 힘들다고 한다. 출판 번역이라면 따로 지면을 할애해서 부연 설명이라도 해줄 수가 있는데 영상 번역에서는 요원한 일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요즘 같으면 국어사전에까지 실린 ‘센티하다’는 식으로 번역 아닌 번역을 할 수도 있는 일에 저렇게 명확하면서도 명료한 번역 하나는 그 빛을 더 발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우리말 어떤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고 보자. “I see my love here and there” 이게 어떤 구절인가 봤더니 <춘향전> 중 ‘사랑가’의 유명한 대목인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이었다고 한다면 ‘이걸 저렇게 번역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들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정쩡한 번역들이 예나 지금이나 넘쳐흐르고 있다. 번역가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들인 공과 품에 비해 턱없는 번역료부터 때로는 출판사를 비롯해 관련 업자들의 어이없는 참견 내지는 갑질 등등 별의별 요인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걸 엄연히 ‘사회문제’로 여기는 이유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열과 성을 다해 고충과 고역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을 번역가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나마 마음뿐이지만 오롯이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