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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철 Mar 09. 2024

번역본색 9

번역가에게 필요한 자질이란 

한때 ‘시골의사’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박경철 씨가 “의사로서 가장 필요한 자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여러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라 답했던 게 떠오른다. 의술, 즉 소위 말하는 ‘실력’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 필요한 자질이라고 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제 아무리 뛰어난 실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들로 환자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의사라면 정녕 훌륭한 의사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그의 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번역가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번역가로서 해당 외국어를 모어로 옮기는 기술, 즉 ‘실력’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흔히 말하는 ‘기본값(default)’이다. 진정으로 번역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자신의 번역을 봐줄 사람들을 위한 소통 능력이며 여기에는 꽤나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언제나 ‘천형’처럼 따르는 오역의 가능성을 단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여러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야 할 때도 많고, 오역은 아니더라도 보다 정확한 번역을 위해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분야의 전문적인 부분까지 참고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상당히 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는 중노동임에도 그에 대한 품삯은 예나 지금이나 야박하기 그지없기에 번역 수준의 아쉬움을 오롯이 번역가 탓으로만 돌리기엔 구조적인 문제와 더불어 꽤나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는 바,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별도로 다루려 한다.      


번역가에게 필요한 또 다른 자질이라면 꼼꼼함을 짚고 싶다. 이는 번역가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직업에도 필요한 자질이긴 하지만 번역가에게는 특히 그런데, 지난 <번역본색>에서 “미국 북부의 애리조나 주”라는 말의 문제점을 짚은 바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워싱턴 출신”이라는 식의 번역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꼼꼼하지 못한 번역이다. 미국의 수도로서 특별 자치구이기도 한 Washington D.C.를 말하는지, 아니면 일찍부터 동성결혼을 합법화 시켰던 State of Washington, 즉 워싱턴 주를 말하는지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두 워싱턴이 얼마나 다른지는 미국 지도를 놓고 두 지역의 위치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쉽게 언급하자면 두 지역의 거리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서울에서 부산을 대여섯 번은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아울러 ‘출신’이라는 말도 따져봄직 하다. 출신은 태어난 장소나 지역을 일컫는 말로서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과는 다를 때 쓴다. 그런데 번역본에서 쓰인 ‘출신’을 원문과 비교해 보면 태생 장소와 현재 거주 장소가 같은 데도 써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명백한 오역이다. 언급한 부분만 보더라도 번역은 생각보다 세부적이고 꼼꼼한 작업이 필요한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故 안정효 선생은 “빈 칸도 하나의 단어라고 생각하면 결코 우리말 띄어쓰기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남겼는데 세심함이 번역에는 얼마나 필요한지 잘 드러내준다. 아울러 안정효 선생은 우리말 실력을 유독 강조하셨는데 “우리말보다 외국어를 잘 한다는 건 반성을 할 일이지 자랑할 일이 절대 아니다”는 말씀이 개인적으로는 큰 울림을 주었다. ‘반증’과 ‘방증’을 구분 못하고 쓰는 번역본은 단언컨대 제대로 구분해서 쓰는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며, ‘혼돈’과 ‘혼동’을 구분하지 않고 쓰는 경우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세심함과 유려한 우리말 번역이 빛나는 번역본을 말 나온 김에 안정효 선생의 그것으로 이번 <번역본색>은 꾸미려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눈부셨던 보도 활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Tom Tiede의 글 중 일부인데 안정효 선생도 그 자신이 직접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어서 개인적으로도 그의 보도문에 관심이 많았었다고 한다.      


The single candle lit the table as the weary GIs picked at C-ration tins and sipped hot soup.     


해당 글의 첫 문장이다. GI나 C-ration은 사실 군사적 전문 용어들이지만 관련 콘텐츠들이 워낙 널리 알려지기도 했어서 일반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리고 이런 전문 용어들은 또한 번역에 어려움이 있지 않다. 말 그대로 전문 용어로서 그 뜻이 명확히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진짜 번역의 어려움은 위 문장에서 picked at 같은 부분이다. ‘집어먹었다’ 해도 되고 ‘집어들었다’ 해도 되며, ‘골라먹었다’고 해도 모두 틀리지는 않은 번역이다. 그러나 세심함은 부족한 번역들이다. 전투식량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봤자 전투식량일 뿐이다. 더구나 전쟁이 한창이던 전장에서 내 목숨을 장담하기 힘든 그 상황에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이 그저 그렇게 집어 들어 먹거나 골라 먹거나 그랬을까? 여기에 안정효 선생은 “깨작거렸다”고 번역했다. sipped hot soup는 어떨까? 얼른 보면 앞에 and도 있고 해서 병사들이 식량을 먹고 뜨거운 스프도 홀짝였다는 식으로 번역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문적인 식견이 부족한 번역이다. 지금이야 전투식량을 담는 용기들이 무척 개량되었지만 60년대 당시에는 언급된 C-ration tins에 hot soup를 담을 만한 여건이 결코 못 되었다. 따라서 식량을 깨작거리는 병사들과 뜨거운 스프를 “찔끔거리는” 병사들은 서로 다른 이들인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찔끔거리다”에 인용 부호를 넣은 건 안정효 선생의 번역이라서다. “깨작거리는” 병사들과 가장 호응하는 번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the not-so-funny story of a combat comedian...     


이건 해당 글의 제목이다. 이 번역 역시 결코 만만치가 않다. 우선 영문 기사에서 제목은 be동사와 관사, 그리고 전치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앞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저 제목은 오롯이 소문자로만 되어 있다. 글 꽤나 쓰는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작가가 원칙을 몰랐을 리는 없고 저기엔 다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명확한 이유까지야 알 길이 요원하지만 아마도 제목도 본문의 한 문장처럼 쓰고 싶어서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끝에 말줄임표를 덧붙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실제 번역의 어려움은 combat comedian 같은 단어다. 영어는 alliteration이라 하여 이른바 ‘두운’을 상당히 즐겨 쓰는 언어다. very clear라고 하면 될걸 crystal clear라 쓴다든가 playground마저 맥도날드는 play place라고 표기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밖에도 예를 들자면 엄청 많지만 단적인 예로 Mickey Mouse와 Donald Duck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보다 상세한 사항들은 <영문본색> 쪽글들을 참고해 주시길) 단언컨대 그 두 캐릭터가 그렇게 두운을 이루지 않은 다른 이름이었다면 그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하튼 그 때문에 war comedian이라든가 battle comedian이라 쓰지 않고 부러 combat comedian이라 쓴 것일텐데 이를 살려 번역할 길이 우리말에는 요원하다. 일단 comedian을 코미디언이라 하면 그건 애당초 아예 번역 자체가 못된다. (그럼에도 외국어를 마치 외래어인 양 그대로 가져다 쓰는 쭉정이 번역들이 얼마나 넘치는가) 그렇다고 개그맨이라 번역하는 것도 적절하다고 보기 힘든데, 안정효 선생은 “익살꾸러기”라고 번역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combat comedian의 두운을 굳이 살리자면 ‘전장의 장난꾸러기’라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 같다. 적어도 개그맨이나 코미디언보다는 나은 번역일 것이고.


한국 영상번역가 협회 회장과 서울여대 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한 박찬순 선생은 찬사를 얻은 번역들을 숱하게 해내셨음에도 언제나 그보다 더 나은 번역이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밥도 잠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번역계에서는 그래도 다행히 아직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나타나진 않는 듯 하다. 영상 번역이든 출판 번역이든 번역은 결국 누군가에게 보이거나 읽히게 마련이고 그 과정을 통해 번역의 성과가 판가름 나는 냉정한 심판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늘 심판에 대한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마음가짐 또한 번역가들에게는 꼭 필요한 자질이라 생각한다. 당당하되 거만하지 않고, 겸손하되 비겁하지 않는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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