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다. 원래 확실한 것이어서 확실한 것이 아니다. 계산과 실험을 통해서 입증할 수 있는 것만이 확실하다. 양자역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과학자들이 이해한 양자역학에 따른 과학자들의 주장들이다.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 실험을 통해 자신들의 가설을 입증하려는 것, 불확실한 것에 열려 있는 것, 그럼에도 확실성을 입증하려는 것, ‘과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정체일 것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말했다는 ‘트랜지스터’, 그로부터 오늘날 스마트한 세상을 가능하게 했다는 ‘반도체’ 기술을 양자역학의 총합이라고 한다면, 점점 스마트해지고 있는 인류의 미래는 양자역학이라는 불확실성의 과학에 기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를 스마트하게 하는 과학과 기술 역시 불확실성에 ‘열려 있다’는 사실만큼은 희망적으로 보인다. 인류가 과학기술을 통해서 ‘어떤’ 스마트한 세상을 만들어 갈지는 열려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스마트한 과학기술이 오늘날 ‘자본주의(경제), 기후, 전쟁’의 위기를 스마트하게 넘어갈 수도 있을까.
과학과 기술의 이름으로 사람 착취 없는 지속적인 생산력의 증대, 자연 파괴를 예방할 에너지 개발, 지구를 파멸하지 않을 전쟁 무기의 발명도 스마트한 과학기술에 열려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수학적 계산과 과학적 실험이 없었다면 현재의 인류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아도르노) 언어의 계산과 사유의 실험(철학)이 없었다면 나름 ‘의미 있는’ 현재의 인류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도,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지속 가능한 지구의 가능성에, 과학도, 기술도, 사유도 열려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고 언어의 계산과 사유의 실험으로 쓴다. 불확실함이 입증되면 다시 써야 할 테지만 말이다.
2024. 7. 24.
<대문사진> 독일 베를린에서 영진 찍음. 20세기 베를린의 사람들(?)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