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와 엥겔스의 ‘경제학’ 연구가 ‘정치경제학’ 연구인 이유는 경제와 정치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들의 연구가 정치경제학 ‘비판’인 이유는 기존의 정치와 경제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문제를 간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낮은 임금, 긴 노동시간, 높은 물가, 부자 감세나 탈세, 금리, 환율, 주가, 관세 변동, 경제 양극화, 경제 전쟁과 같은 일상적으로 겪는 세계사적인 경제 문제가 경제 법칙에 의해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겠다.
경제도 인간의 활동에 의한 것이니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간들이 어떻게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말일 것이다. 그럴 때 도움이 필요한 인간 활동이 정치일 것이다. 경제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활동일 것이다.
그때 정치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애쓰는 활동일 것이다. 규율이나 규제를 완화하거나 강화하거나, 조율이나 조정과 같은 타협을 통하는 것이 정치일 것이다. 어떻게 정치를 하느냐에 따라 경제적인 문제들의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데, 정치에 의해서 경제적인 문제가 해소되거나 경제 상황이 달라질 것이 없다면, 달라지게 할 수 없다면, 정치가 소수 권력의 이익과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라면, 모두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왜 그럴까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실제 모든 정치는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모든 정치가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 사실은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정치가 정치다워지면 될 것이다. 모두를 위한 그런 것으로 정치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한데, 그런 정치를 만들기 위해서 또 다시 생사를 건 전쟁에 참전을 해야 한다면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어제, 오늘, 내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와 정치라면 기존의 정치, 경제와는 다른 정치경제적인 삶을 생각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정치경제 체제라는 것이 그만한 생산력 수준이 될 때 변화를 겪는 것이라고 했으니 그 또한 때가 되면 변화의 순간이 올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가능한 변화에 소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경제에서도 정치에서도 제국의 질서에 의해 고통과 전쟁을 겪더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욕구를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외면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역사의 발전 법칙이 어떠하든 법칙을 만들어가는 것도, 먼 미래의 일일 것만 같은 것들을 현재화하는 것도 인간 역사의 법칙이기도 할 것이니 말이다. 토머스 모어가 말하는 유토피아, ‘생계 걱정 없이 가족, 이웃과 즐겁게 살아가는 곳’은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는 않다.
2024. 11. 21.
대문사진 - 쿠바, 바라코아. 영진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