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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Aug 10. 2023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헤로도토스 [역사] 읽기

1


헤로도토스는 “행복이란 덧없는 것임을 안다”(1권)고 말한다. 남의 것을 빼앗아 부와 권력을 이루는 행복의 운명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전에는 강력했던 수많은 도시가 미약해지고, 내 시대에 위대한 도시들이 전에는 미약했다.”(1권)는 것이 빼앗는 자들이 마주할 행복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헤로도토스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통한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에는 수많은 다른 민족과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자고 제안했던 이에게 퀴로스 왕이 했던 “지배 민족에게 피지배 민족이 될 각오를 하라”(9권)는 경고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 경고에 따라 어떤 페르시아인들은 “평야를 경작하며 남의 노예가 되느니 척박한 땅에 살며 지배자가 되기”(9권)를 선택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전쟁을 선택했다.   

   

빼앗고 빼앗기는 전쟁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빼앗는 행복을 덧없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몫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2     


아르타바노스는 그리스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크세르크세스에게 신중하라는 조언을 한다. “인간은 상황의 지배를 받는 것이지 상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7권)라는 말과 함께. 아르타바노스의 지혜는 현실을 전체적으로 볼 줄 아는 혜안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냉철하게 파악하고 그에 따른 판단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기보다 기존에 하던 대로 행동하거나 자신의 의지에 기대어 행동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상황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아르타바노스는 크세르크세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 것이다. 그럴 경우 대개 상황에 적합한 행동에 실패하게 된다.      


신중론을 펼치는 아르타바노스에게 크세르크세스는 소심하지 말고 대범하라며 위험을 감수해야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소심해서는 어떠한 행동도 주저하게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경솔한 행동은 우를 범하기 마련이라는 것 또한 맞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행동을 하게 되는 순간은 찾아오게 마련이며, 그 행동의 적절함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파악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 온몸을 던지는 판단을 통할 때 자신이 바라는 상황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르타바노스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지혜는 상대적으로는 모든 입장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그중에서 더 적합한 상황 판단과 행동을 못하게 만드는 상대주의로부터 멀리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소중해 보인다.  


         

3     


소아시아 메디아의 왕 데케이오스는 그 어떤 왕 보다도 훌륭해 보였다. 메디아를 정의롭게 다스렸고 다른 민족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헤로도토스가 그리스인들에게 조공을 강요하고 지배를 일삼았던 최초의 인물로 언급한 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 대비되기도 한다.      


그 두 왕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권력욕의 차이일까. 아니면 그들 민족의 관습의 차이일까. 스스로 건강한 민족이라면 침략하거나 침략당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침략하지 않고 서로 도우며 살았던 역사가 존재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4


“자유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의 달콤함을 알지 못한다.”(6권) 그리스의 자유민이 페르시아인에게 했던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리스의 자유민 들은 자신들이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 타인에 대한 억압을 통해 자신들이 자유의 달콤함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리스 시대의 자유민들, 오늘날 ‘자유주의자’라고 불리는 어떤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억압받는 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참주제를 넘어 제한적으로나마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것이 그리스 민주제의 의의라고 한다면, 노예제가 존재했고 여성참정권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차별과 억압. 2,500년 전과 오늘을 단순히 비교할 수 없다. 다만, 얼마나 나아졌는가라는 물음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물음일 것이다.      


자유, 인권, 평등, 차별철폐, 불평등 해소. 무엇이라 부르든 그러한 가치들은 부단히 요구하고 쟁취할 때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며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고 확장되어도 좋은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차별 및 인권에 대한 교육, 차별적인 제도들을 부단히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과 제도의 개선을 위해서도 “정치·경제적 불평등”이 우선적으로 해소되어야 한다. “정치·경제적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즉 인간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물건처럼 수량화·상품화하여 값을 매기고 도구처럼 이용하는 자본 중심 구조와 야만적인 권력이 존속하는 한, 생계를 위해 노예처럼 일해야 하는 “노예화”나 여성들이 性을 팔도록 내몰리는 “성매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치·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해소를 위해서 민주제든 또 다른 형태의 제도든 제도를 운영하는 이들(정치인 및 관료들)이 필요하고 선출할 수밖에 없다면, 거의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선거제도”에 대한 관심은 중요하다.      



5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서 발생한 전쟁의 원인을 밝히려 했다. 그것은 누구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탐구였다. 소아시아 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최초로 그리스인들에게 조공을 강요하고 지배를 했다는 점, 그리스 식민도시인 아리스타고라스의 권력욕, 이오니아인들의 참주제에 맞선 반란 등이 헤로도토스가 밝히는 페르시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가 이야기하려는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왕들과 귀족들, 즉 상류층들의 권력에 대한 지나친 욕심, “탐욕”이라고 할 수 있다. 

     

탐욕스러운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민주제는 탐욕을 막을 장치임에 틀림없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제는 그러한 견제 장치로서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의 민주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민주제 내에서도 권력투쟁은 끊이지 않은 것이다. 제도라는 것은 꼭 필요한 장치이다. 그래서 그 장치를 운영하는 인간들이 어떠한가라는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탐욕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탐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들이 어떠한가를 규정하는 삶의 양식(樣式), 즉,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문화가 사회 전반에 흐르도록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부단한 성찰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치·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제도들이 마련될 것이고,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찾을 줄 아는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으면서’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자아와 세계를 성찰할 줄 아는 인식의 힘을 키우는 것은 자유인이 되기 위한 밑거름이다. 고전을 읽으며 스스로 자신이 바라는 삶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 밑거름을 다지는 시작이다.


2017.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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