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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Aug 02. 2023

다름과 옳음

헤로도토스 [역사] 3권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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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는 [역사] 3권에서 고대 페르시아의 왕 캄뷔세스가 완전히 실성했다고 진단한다. 캄뷔세스가 자신의 친동생과 누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의 신전에 들어가 그곳 신상들을 실컷 조롱한 다음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세상의 어느 민족이든 모든 관습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선택하라고 하면 일일이 검토한 뒤 자신들의 관습을 선택할 것이다. 그만큼 모든 민족은 자신들의 관습이 가장 훌륭하다고 믿고 있다.”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들 민족의 신앙이나 관습을 조롱한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인도의 장례관습을 예로 들어 그들 민족이 자신의 관습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다레이오스 왕이 페르시아를 통치하던 시절 측근의 그리스인들을 불러 돈을 얼마나 주면 죽은 부모의 시신을 먹을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레이오스 왕은 이번에는 부모 고기를 먹는 풍습을 가진 칼라이타이라고 불리는 인도인들을 불러, 어느 정도의 돈을 주면 죽은 부모를 화장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 인도인들은 큰 소리로 왕에게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 달라는 간청을 했다.”


헤로도토스는 관습의 힘이란 그런 것이라고, 즉 “관습(노모스)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라는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의 시구는 진실로 옳다는 말로 관습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왕보다도 힘이 센 만물의 왕이 관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관습을 조롱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2       


캄뷔세스가 실성했다는 헤로도토스의 진단에 완전히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진단보다 정작 궁금한 것은 캄비세스가 왜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 될 그런 행동들을 했는가라는 점이다.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단지 캄뷔세스 개인의 문제(질병이 있었다거나)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캄뷔세스 이전의 왕들에게서도 그런 미친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왕들은 그야말로 신(神)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왕의 말씀은 곧 신의 말씀이요 신의 말씀은 곧 왕의 말씀이었다. 그런 말씀은 거역할 수 없는 무조건 따라야 할 ‘자연의 이치’로서 관습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대 그리스어 nomos(관습)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왕보다 관습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습은 왕이 만들며 왕의 말씀이 곧 관습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캄뷔세스가 누이와 결혼하고 싶어 법을 바꾸는 것은 대수로워 보이지 않는다. 왕이 곧 신이요 관습인 고대 사회에서 왕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그런 이유에서 [역사]에 등장하는 고대의 왕들 중 오히려 이상해 보이는 왕이 데케이오스다. 그가 정의를 중요시하고 다른 민족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1권 참조). 


캄뷔세스는 미친 것이 아니라 평소 하던 관행대로 했던 것일 뿐이다. 권력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 것이며 미쳐도 괜찮게 만들어 주는 것이 법과 제도를 뒷 받침해주는 관습이다. 왕이 무슨 짓을 해도 따라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관습이라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보다 더 미친 짓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런 미친 권력을 견제할 제도적인 장치가 있는가라는 것과 국민들의 태도일 것이다. 국민들이 그런 미친 권력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는 시대였기에 그런 미친 행동이 가능했을 것이고 그런 국민들이 권력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길은 없었을 것이다. 


캄뷔세스가 죽고 다레이오스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도전이 있었다. 민중들이 정치를 하는 민주제, 귀족들이 정치를 하는 과두제가 주장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군주제를 주장한 다레이오스가 왕이 된다. 세 정치체제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당시 문제적이었던 군주제가 아닌 ‘다른’ 정치체제가 경험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정치체제가 국민들을 제약하기도 하지만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낼 수도 있고 국민들은 참여와 견제를 통해 더 나은 정치체제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는 점에서 아쉬운 것이다. 


기존의 관습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오랜 시간 다수가 따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훌륭한 관습이 유지되기도 한다. 문제는 악습 역시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에 바꾸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다수에 의해 통용되어 습관처럼 굳어진 ‘기존의 것’이라는 이유에서 관습은 힘이 센 것이다. ‘악습’이라는 판단 자체가 힘들 수 있으며 ‘악습’이라고 문제 삼는 것은 불온한 소수의 목소리로 묻히기 십상이다. 


‘자연(自然)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들의 삶을 편리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세상에서 ‘자연의 이치’는 온전히 자연만의 이치일리 없다.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인간의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이치가 자연의 이치가 되기 위해서는 특정 인간들만 편리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자연의 이치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애초에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 자연에 의문을 가지고 관찰함으로써 여러 다른 경험을 통함으로써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삶을 자유롭게 해 줄 이치인지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3       


다른 민족의 관습을 조롱한 것을 헤로도토스가 문제시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다름’에 대한 자각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민족은 다른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탐구와 경험을 통해 알았던 것이다. 다른 민족은 우리와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이 다른 관습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와 다르다는 것은 받아들여야 할 사실인 것이다. 우리와 다르다고 조롱하는 것은 그들 민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경우 죽음마저도 불사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역사 속 힘센 자들은 침략의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 그렇게 싸움을 걸기도 했다) 


다른 민족의 관습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존중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우리 관습에 비추어 다른 민족의 관습이 ‘다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틀렸다’는 가치 판단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 ‘틀렸다’는 가치 판단은 가능하겠으나 다른 민족의 관습이 틀렸다고 조롱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그들 민족 내부가 아니라 다른 민족의 입장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자신들 민족 내부에서라면 다를 수 있다. 민족 구성원들을 불편하게 하여 불행하게 만드는 관습이라면 구성원들이 문제 삼고 바꾸려 할 것이다. 왕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관습이기도 하지만 잘못된 관습을 바꾸려는 것 또한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랜 관습이기도 하다. [역사] 곳곳에서 캄뷔세스를 비롯한 악행을 저질렀던 왕들에 대한 반란이 등장한다. 그것은 인간답게 살겠다는 ‘자유’에 대한 외침이다. 법이나 제도는 인간들 사이의 삶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장치들이다. 그 장치들이 오히려 인간들을 불편하게 하고 억압하는 한 그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저항의 관습에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연발생적인 것도 있지만 헤르도토스와 같은 이들도 한몫을 한다. 우리와 다른 관습도 있다는 발견은 우리의 관습을 돌아보게 하고 다른 관습을 꿈꾸게 만든다. 다른 관습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문제적인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런 악행(선행)에 대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와는 다른 관습에 대해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습이 다른 민족에게 해를 끼칠 때 그들 민족의 관습은 그들 내부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들의 관습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존중받겠다면 다른 민족의 관습 또한 그런 것이라고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민족 내부의 문제를 넘어 외부의 문제가 된다.           



4       


다른 민족을 조롱함으로써 발생하는 외부와의 충돌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시 내부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미친 권력과 그런 권력을 가능하게 한 국민들의 문제를 살펴야 할 것이다. ‘다름’을 존중할 수 있는 국민과 권력의 문제가 그것이다. 나와 다른 것을 존중할 줄 아는 국민들에 의해 탄생한 자신과 다른 국민들의 뜻을 존중할 줄 아는 권력이 다른 민족을 존중할 가능성은 커 보인다. 그런 국민이라면 자신들의 국가권력이 다른 민족의 관습을 조롱하는 일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다름’에 대한 존중을 망각할 때 ‘다름’이 ‘틀림’이 되는 순간이 발생한다. 다른 민족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준에서 ‘틀렸다’고 평가하여 조롱하는 행위는 ‘틀린 것’ 일 수 있다. ‘틀렸다’는 그들의 판단 자체가 ‘틀린 것’ 일 수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내부를 틀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틀렸다’는 판단이 그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만일 진정으로 틀렸다고 판단되어 문제 삼는다면 오히려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려 할 것이다. 특히 그 판단이 강자(권력자들, 다수목소리)의 것일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강자의 기준에 따라 일방적으로 ‘다름’이 ‘틀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독재, 파시즘)

다름을 인정하면서 ‘옳음’을 함께 만들어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각자가 서로 다른 자유로운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함께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2017.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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