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 <역사>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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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여 년 전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과학과 철학이 태동하던 시대를 살았던 헤로도토스가 ‘역사歷史’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여 역사가 된 ‘history’의 그리스어 어원 ‘historiai’에는 ‘탐구探究’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조사해서 배우거나 아는 것’, ‘진리나 학문 따위를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는’것이 탐구의 의미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서문에서 역사를 쓴 이유를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밝히는 것(탐구)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전쟁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인간이 쓴 최초의 ‘역사’는 ‘전쟁’ 때문에 탄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전쟁의 ‘원인’(인과법칙)을 밝히려 하거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갖게 된 것은 비로소 인간이 ‘생각’(과학적이고 반성적인 사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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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가 헬라스인(그리스인)들에게 최초로 조공을 강요하고 헬라스인들을 노예로 삼았다고 밝힌 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침략한다. 퀴로스에게 붙잡힌 크로이소스에게 퀴로스는 사람 착해 보이는데 왜 침략했느냐고 묻는다. 처음에 크로이소스는 신(神)의 뜻이라고 했다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크로이소스는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그런 욕심이 생겼을까. 이후 그리스를 침략했던 크세르크세스 왕이 밝힌 침략의 이유는 이전 왕들의 업적을 계승하고 왕들을 해한 민족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르타바노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에게 이전 왕들이 패배한 경험과 육지와 바다의 현실적인 상황 판단에 따라 전쟁에 신중하라고 조언한다. 감히 왕에게 그런 조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왕의 숙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크세르크세스도,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했던 아르타바노스도 꿈속에 나타난 조상들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 헤로도토스는 “관습(노모스)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라는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의 시구는 진실로 옳다는 말로 관습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왕보다도 힘이 센 만물의 왕이 관습이라는 것이다. 크로이소스가 자신이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조상들이 살던 대로 관습에 따라 살았을 뿐 자신의 행위를 돌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3
기존의 관습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오랜 시간 다수가 따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훌륭한 관습이 전통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악습 역시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에 바꾸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다수에 의해 통용되어 습관처럼 굳어진 ‘기존의 것’이라는 이유에서 관습은 힘이 센 것이다. ‘악습’이라는 판단 자체가 힘들 수 있으며 ‘악습’이라고 문제 삼는 것은 불온한 소수의 목소리로 묻히기 십상이다.
『역사』 곳곳에서 캄뷔세스를 비롯한 악행을 저질렀던 왕들에 대한 반란이 등장한다. 그러한 저항은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동물적인 본능이기도 하다. 그러한 본능의 명령에 따라 법이나 제도를 만드는 것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행위이다. 그러한 제도적 장치들이 오히려 인간들을 불편하게 하고 억압하는 한 그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자유를 향한 저항의 관습은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이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형성되며 거기에는 ‘경험’도 깃들어 있다. 우리와 다른 관습도 있다는 발견은 우리의 관습을 돌아보게 하고 다른 관습을 꿈꾸게 만든다. 다른 관습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문제적인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런 악행(선행)에 대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4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이 한창이던 전쟁터에서 아테네 자유민이 페르시아 병사에게 “자유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의 달콤함을 알지 못한다.”(6권)고 회유하려 한다. 페르시아 병사가 회유당할 리가 없다. 경험했든 안 했든 자유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자유민이 페르시아 병사에게 했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리스의 자유민 들은 자신들이 타인(노예,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 타인에 대한 억압을 통해 자신들이 자유의 달콤함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스 시대의 자유민들, 오늘날 ‘자유주의자’라고 불리는 어떤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억압받는 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테네 자유민이 말하는 자유는 기존의 관행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자유는 자기 행위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 성찰이 외적 경험을 통해서 시작되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성찰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인류의 시간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성찰(철학)에서부터 시작되어 그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를 기록(역사)함으로써 그렇게 인류의 시간은 흘러갈 뿐이다.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기존의 관행을 깨고 자유로워지고 진보하는 것은 흘러가는 역사가 아니라 성찰하는 인간의 몫이다.
성찰을 통해 관행을 깨고 한 발짝 나아가는 것, 그것이 자유와 진보가 시작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던 그리스 시대를 살았던 헤로도토스에게 인간은 조상들이 하던 관행에 대해 자기 성찰할 줄 아는 존재,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줄 아는 존재, 그렇게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평야를 경작하며 남의 노예가 되느니 척박한 땅에 살며 지배자가 되기를 택했던 것이다.” 『역사』의 마지막 대목이다. 페르시아가 주변 민족들을 정복하면서 제국을 이루어가던 시절 퀴로스 왕에게 신하들은 더 많은 민족을 정복하자고 제안한다. 퀴로스는 그 제안대로 하겠다면 “지배 민족에게 피지배 민족이 될 각오를 하라”는 경고를 한다.
페르시아인들은 그의 말이 옳음을 인정하고 물러났고, 자신들의 견해가 퀴로스의 견해보다 못하자 “평야를 경작하며 남의 노예가 되느니 척박한 땅에 살며 지배자가 되기를 택했다.”는 것이다. 퀴로스 왕의 경고에 따라 어떤 페르시아인들은 다른 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지 않았지만, 역사 속에서 어떤 페르시아인들은 전쟁을 벌였고 패하여, 퀴로스의 경고대로 피지배민족이 되기도 했다.
그들 페르시아인들이 살았던. 2,500년여 년 전부터 그 이후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끊
이지 않았다.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순환의 역사는 반복되었고 반복되고 있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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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역사 속에서 헤로도토스는 현자 솔론의 입을 빌어 “복을 가장 많이 타고나고 그것을 끝까지 누리다가 편안하게 죽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쓰고 있다. 솔론이 예로 든 타고난 복은 번성한 나라, 넉넉한 살림, 건강한 몸, 자식 복, 시련을 겪지 않는 것, 잘생긴 외모 등이다. 태어날 때 복을 취사선택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누구에게나 타고나는 복이 있다.
솔론이 말하기를 어떤 이는 타고난 복이 많고 어떤 이는 적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타고난 복의 많고 적음이 곧바로 행복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타고난 복이 많다면 행복할 것이다. 타고난 복이 적은 것을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솔론은 모든 복을 타고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타고난 복을 어떻게 누리느냐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복을 타고나도 모든 복을 가지지 못한 것을 탓하며 더 많은 복을 누리려다 있던 복마저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은 복을 타고났지만 그 복을 잘 누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타고난 복도 중요하지만 그 복을 어떻게 잘 누리며 사는가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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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복들은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한 인간이 탄생하기 이전에 주어져 있는 환경, 즉, 한 국가의 구성원들이 만들어 놓은 공동체의 상태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국민들이 큰 차등 없어 보이는 복을 타고날 수 있다면 더 많은 국민들이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인 셈이다.
솔론의 말대로 타고난 복을 죽을 때까지 누릴 수 있는 공동체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 더해 솔론이 말하는 아름다운 죽음이란 것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연결된다. 만일 그런 행복한 공동체라면 더 많은 복을 누리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아름다울지언정 희생을 감당해야 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솔론이 말하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개인들의 행복을 보장해 줄 국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국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불의가 아닌 정의, 예속이 아닌 자유, 세습정이 아닌 민주정,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의지, 악습이 아니라 지혜가 담긴 훌륭한 관습 등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조건들이 뒷받침된 국가에 사는 인간들이라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번영한 국가의 민주적인 정치체제 아래에서 부모와 자식들이 넉넉한 살림 속에서 건강하게, 즉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 『역사』,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09.
2022.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