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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즘 Jul 02. 2024

당사자주의와 논쟁적인 글쓰기

당사자 활동가는 어째서 키보드 파이터가 되었는가

  '더인디고'에 성격장애인으로서 겪는 차별에 분노하는 글을 올린 몇 달이 지나 피드백이 왔다.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단체의 대표님께서 내 칼럼을 다 읽어보았다면서 어디 아픈 구석은 없는지, 그 글이 기관(회사)과의 협의를 거쳐 탄생한 것인지 여쭤보셨고 내 머릿속은 아뜩해졌다.


  보통 장애당사자 활동가라면 전장연과 부모연대 등지에서 오체투지와 화요시위를 하는 강렬한 운동을 하는 이들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 활동가들이 논쟁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정신장애 당사자 활동가는 다르다. 정신장애계에서는 동료지원 내지는 동료상담과 회복패러다임을 큰 가치로 두고 있으며, 활동가들은 양성과정에서부터 동료에게 다가서는 법, 경청하는 법, 공감하는 법 등을 배운다. 큰 단체에 속한 활동가들은 다른 동료나 전문가로부터 슈퍼비전을 받기도 한다.


  사람을 다가가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공감을 중요시하는 정신장애계에서 논쟁적인 글쓰기를 하는 나는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자폐로 인해 타고난 공감능력이 부족했던 나의 감수성은 자연스레 문학이 아닌 신문과 시사 주간지로 흘러갔고, 세상을 비판하는 글들을 읽으면서 세상에 감사하는 법보다는 세상을 원망하는 법부터 배워갔으니 말이다. 그런 성장과정을 지닌 나에게 '공감 초능력자'들이 난무하는 정신장애계에서 적응하는 일은 근본적인 부적절감을 갖는 일이었다.


  알고 있었다. 원래 칼럼니스트는 고독한 직업이라는 것을. 글은 혼자 써야 된다는 사실을. 이미 게재된 글을 독자가 내리라마라 할 권리는 없지만 내 글에 대한 비판을 내가 내리라마라 할 권리 역시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외로워서였나, 칼럼니스트는 원래 논쟁적인지에 대해 검색해보다가 위근우 씨의 '이토록 귀찮은 글쓰기'를 보게 되었다. 서평 제목에서부터 '논쟁적인 글쓰기'라니. 야심한 밤에 바로 이북으로 결제하였다.


  거만하겠지만,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방법론은 나 역시 익히 아는 것으로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은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구석이 있었다. 날카로운 글을 쓰는 전업 칼럼니스트의 책이 내 감성을 자극하다니.


  공론장에 참여하길 원한다면 나의 부족함을 아는 만큼이나 타인의 논리를 굴복시켜야 한다는 말, 어떤 글도 논쟁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이유는 글쓰기보다 공론장이 우선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를 감동시키면서도 어쩐지 슬프게 했다. 위근우 씨의 그 문장들이 '칼럼니스트는 원래 고독한 것'이라는 인증딱지를 새긴 듯 아팠다.


  당사자주의로 돌아가보자. 당사자에 대한 따뜻한 공감을 활동의 동력으로 삼는 정신장애계와, 정신장애와 당사자주의에 대한 첨예하고 논쟁적인 글쓰기를 하는 나 사이에는 불화가 존재한다. 아무리 그들과 사적으로 친하다고 할지라도 섞이기 어려운 묘한 기류가 흐르는 건 사실이다.


  공감능력이 없는 자폐 정신장애인인 나와, 공감능력이 좋은 정신장애인의 불화를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떻게 건강하게 해소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연결고리를 차별에 대한 분노에서 찾는다.


  정신장애인은 정신장애인으로 살면서 사회적 장벽과 차별을 경험한다. 때로는 강제입원을 당해 사지가 묶이고 주사를 강제로 맞기도 한다. 그런 불합리하고 비인권적인 일을 겪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옹호할 언어를 찾지 못해 방랑해왔다. 때로는 치료가 인권이라는 의료계의 레토릭에 당해낼 재간 없이 굴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차별의 경험은 조금 다를지라도, 나에게는 언어가 있었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을 폭력이라 인지하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는 언어가 나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전문가권력과 당사자 양쪽을 긍정하는 무책임한 양시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편에 서고 기존 권력에 대항하는 '논쟁적 글쓰기'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의 언어와 글쓰기가 지금 당장은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 같아도, 미워하는 대상은 당사자를 억압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기존의 시스템과 권력이다. 다른 정신장애인들이 나에게 따뜻한 공감과 위로를 바탕으로 동료지원을 제공해줬듯이, 나 역시 그들의 아픔을 공론으로 만들 수 있게 벼린 언어를 제공해주면 되는 것이다.


  정신장애 칼럼니스트로서의 직업 윤리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나의 논쟁적인 글쓰기는 어디까지나 당사자를 위해야 한다는 것. 당사자를 위하지 않는 논쟁적 글쓰기는 그냥 논쟁일 뿐이다. 그것도 당사자들이 외면하는 논쟁일 뿐이다.


  나는 공감능력 쥐뿔도 없는 자폐인이자 정신장애인으로서의 이중고적 삶을 살아가는 경계의 존재이다. 그런 내가 경계의 존재로서 정신장애계에 헌신할 수 있는 방법은 차가운 논리로서 다른 당사자를 따뜻하게 끌어안는 법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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