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천년의 적이라면 일본은 백 년의 적이다. 중국과 같은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살면서 흡수되지 않고 국가의 정체성을 지킨 우리나라를 보고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그 자체로 기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처럼 우리가 자리하고 살고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엄혹하다. 적과 싸우고 적과 동침하면서 우리는 수천 년을 생존했다.
1964년 10월 10일에서 24일까지 열린 도쿄 올림픽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딛고 다시 일어났음을 세계만방에 알린 거국적 국제행사였다.
원폭을 두 번이나 맞고 소이탄으로 초토화된 일본이 다시 일어나리라 예측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일본은 국토뿐만 아니라 국민의 사기마저 철저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칼로 흥한 자가 칼로 망하듯이 칼로 망한 자는 칼로 흥할 수 있음을 증명한 백 년의 적 일본은 한국전쟁이라는 제3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자유진영의 병력과 전쟁물자를 공급하고 생산하는 후방기지로서 멈춰 섰던 군수산업을 쉴 새 없이 가동하여 악몽과 같은 패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전시경제를 통해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면서 미국의 방조와 후원아래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하계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1964년 가을에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사람이 시대를 창조해 나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시대가 사람을 불러서 쓴다. 건국과 전쟁의 시대에 자유반공주의자 우남이 지미知美하고 용미用美하고 온갖 어려움을 헤쳐나가면서 민주화의 기틀을 닦았다고 했다면 민주화의 기틀 위에 벽돌을 쌓고 공장을 만들며 국토를 개조할 산업화의 적임자가 대한민국은 필요로 했고 시대는 만주군관학교 수석졸업자이자 일본육사를 유학한 박정희와 운명적으로 만났으며 지일知日하고 용일用日할 수 있는 박정희는 1964년 도쿄올림픽을 통해 다시 일어났음을 증명한 백 년의 적 일본과 동침할 수 있다는 결단으로 대한민국 산업화의 숙명적 환경은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시대가 사람을 불러서 쓸 수는 있지만 소명받은 사람의 행동이 모여 시대는 변한다. 그리고 늘 과거에 머물러 있는 세상 대부분의 여론은 들끓는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 학생 3,500여 명이'제국 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식'을 한 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25일에는 지방에서 약 5,000명, 서울에서는 4만 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26일에서 27일까지 전국에서 약 6만여 명이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는 4·19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 치하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대규모 시위였다.
시대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도 한다. 윈드서핑이 파도를 거슬러 타고 올라가야 하듯이 백 년의 적 일본을 용일用日하기 위하여 백 년의 적과의 동침도 불사하고자 했던 박정희는 먼저 적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생각도 없는 젊지만 수구적이며 과거지향적인 미래세대를 설득하여 미래를 향해 달릴 시간은 태부족했고 그는 군인 특유의 불도저 정신으로 한일회담을 밀고 나갔다.
1908년 1월생은 서울의 대학가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방의 캠퍼스까지 4.19를 방불하는 반일 학생 데모가 격화되는 것을 보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하며 편견과 단견 그리고 맹신과 미신까지 타파해야 겨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 수 있음을 절감하면서 망국의 식민지 청년 시절 거악의 일제하에 숨 죽이고 오로지 가슴에 비수를 품고 실력과 자강만이 독립과 건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자신의 젊은 날을 되돌아보고 식민지 청년출신의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 백 년의 적 일본과 손을 잡으려는 결단과 고뇌 앞에서 마음속 심연의 끝자락에서 설명할 수 없는 복받침이 올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처럼 역사의 흐름은 냉혹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우리가 쌓은 원인의 결과일 뿐이다. 1964년 한반도를 둘러싼 기운은 천년의 적 중국이 1958년에서 1962년 사이 진행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으로 무려 수천만 명이 아사하는 참극을 초래하며 자멸하고 있었고, 자유진영으로 편입된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기적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으며 미국은 세계패권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일 간의 경제협력에 적극적이었다.
거악의 일제강점기 일제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 자강 하고 실력을 기른 망국의 식민지 청년이자 건국의 해방정국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돌아온 지일知日과 용일用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박정희가 하필이면 그때 그 시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대한민국 산업화를 설명하는 원인 중 하나라는 역사적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한반도 백년전쟁에서 내부 분열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역사의 주관자가 있다면 꼭 한번 묻고 싶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