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배 아저씨가 보낸 첫 문자가 알람처럼 울렸다. 이사 당일 집주인이 해준 도배에 하자가 생겨 보수를 요청했는데 이렇게나 이른 시간에 문자가 온 것이다. 그리고 아저씨는 오기로 한 시간보다 30분이나 더 빨리 집에 왔다. 사다리와 허리춤에 차는 도구띠 그리고 풀이 발린 도배지까지 호리호리해 보이는 아저씨는 꽤 짐이 많았다.
새 싱크대 냄새를 빼느라 짐을 못 넣어서 집은 어수선했고 아저씨는 “아직도 이삿짐 정리가 덜 끝난 모양이네.” 하고 어색하게 말했다. 사다리에 올라선 아저씨는 떨어진 쪽의 도배지를 떼어 냈고 안쪽에는 여전히 이전 세입자가 쓰던 도배지들이 석고보드에 무겁게 붙어 있었다.
“집이 오래돼서 도배지를 떼다가 천장 석고보드가 내려앉을 수가 있어. 그래서 다 뗄 수가 없는 거야.”
그러면서 더 이상 벌어지지 않도록 과거의 도배지들에 타카를 쏘고 드릴로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괴상한 방식의 도배였다.
이전 집에서 도배시공을 맡겨본 적이 있어서 나도 도배에 관한 기본적인 것들은 알고 있었다. 이 집은 소폭합지가 발려 있었는데 가격이 싼 소폭합지 도배를 하는 경우 도배사 한 명에게 맡기면 힘들다는 이유로 이전 도배지들을 제거하지 않고 도배하려 한다는 것도. 나는 아저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사를 하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부동산중개인들, 임대인, 집 보러 온 사람, 이삿짐센터직원, 관리인, 도배기사, 전기기사….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사를 여러 차례 할수록, 나에게 더 많은 정보가 있을수록 사람들에게 의심이 많아진다. 자꾸 그들의 다른 의도를 생각해내려 한다. 의심을 하는 게 미연에 일어날 사고를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의심들은 마음속으로 품고만 있는 게 아니라 남편에게도 얘기를 하기 때문에 피곤해진 남편은 나에게 이런 말도 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믿는다’가 디폴트고 그렇기에 이날까지 종족을 이어온 거야. 사람을 못 믿고 의심하는 건 인간의 기본값을 부정하는 거야. 그럼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어.”
일을 쉬고 있는 상황이라 이사와 관련된 대부분의 것들이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이사 갈 집을 찾는 것부터 이사 와서 다시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까지. 마치 출근해서 일하는 사람처럼 체크리스트에 온갖 이사와 집 관련 해결해야 될 일들로만 빼곡하게 몇 달을 보냈다. 그런데 아직도 해야 할 일은 끝이 없는 것 같고 계획대로 일은 진행되지 않았다.
보수한 곳은 이전 도배지가 남아 있는 쪽과 떼어낸 곳의 단차가 생겨 미관상 거슬려 보였다. 그리고 도배풀과 새 싱크대 냄새가 오묘하게 섞여 거북한 냄새가 났다. 작은방에는 거실 짐들이 잔뜩 들어가 있어 거실이고 방이고 아직도 한창 이사 중인 집처럼 정신이 없었다. 장판에 남은 도배풀 자국들과 한참을 씨름하니 운동한 것처럼 땀이 났다.
새로 이사한 집은 초등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아파트였다. 학교 종소리도 들리고 등교시간에는 노랫소리도 들렸다. 창문으로 보면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는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학교는 한동안 내게 잊고 싶은 곳이었다. 나를 행복하게 한 곳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벗어나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지난 몇 년 간을 학교에서 비정규직 교사로 일하면서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해 왔다. 한 학교에 그리 오래 근무해 본 경험은 없었다. 최장이 2년, 최근에는 6개월마다 다니는 학교가 바뀌었다.
계속해서 새로 적응하며 내 안에 있는 에너지를 너무 많은 이들과 나누다 보니 어느 순간 공허함이 찾아왔다. 끝까지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시작하는 학기도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부턴가 내 마음을 모두 주지 않았다. 관계 맺기에 있어서 어떤 벽이 있었다. 그건 어쩌면 관계의 기본인 믿음이 힘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1차 보수 후에 다른 면이 또 떨어져서 도배 아저씨는 2차 보수를 왔다. 이번에도 약속한 시간보다 더 빨리 자기의 도구들을 챙겨서. 그리곤 떨어진 면만 보수를 했다. 석고보드를 핑계 대며. 그리고 역시나 과거의 벽지를 떼지 않은 부분은 또 떨어졌고 3차 보수를 진행했다.
이사하면서 너무 신경을 써서인지 감기 몸살에 걸렸다. 결국에는 남은 도배지를 다 떼어내야만 하는 힘겨운 작업 후 도배 아저씨는 나가면서 내게 말했다.
“이 집 다시 올 일은 없을 거야. 다신 안 올 거야.” 그다지 감정이 실린 표현은 아니었다.
내게는 이 말이 마치 학교를 나오면서 내가 속으로 했던 다짐처럼 들렸다. 석고보드에 붙은 과거의 도배지들을 다 떼어냈기 때문에 아저씨가 우리 집에 다시 올 일은 정말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아직 떼어내지 못한 과거의 도배지가 내 안에 겹겹이 붙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