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세르주 블로크展 'KISS' Review
연희동 골목길을 굽이굽이 지나다 보면 세르주 블로크의 다락방이 나온다. 2023년 10월 19일부터 2024년 3월 31일까지. 그곳에서 세르주 블로크가 파리에서부터 보내온 러브레터를 받아볼 수 있다. 뉴스나 매거진, 책에 실린 일러스트레이션은 물론이고 4미터 크기의 초대형 설치 작품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유년 시절이 행복으로 충만한 사람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세르주 블로크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이 소유권을 다투는 지역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국적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엽서 뒷면에 아름다운 풍경이 실리는 알자스 지방의 '콜마르'였다. 덕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전쟁에 휘말렸다. 어머니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고난이 많은 유년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르주 블로크는 세상을 향해 KISS를 퍼붓는다. 사랑하는 연인 간의 키스를 그리고, 가족 간의 입맞춤을 말하고, 전 인류가 사랑하기를 종용한다.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그림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더 뉴요커 등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매체에 삽화를 그리고, 에르메스, 삼성전자, 코카콜라 등과 같은 세계 정상급 기업과 협업한다. 공공기관과의 인연도 빼놓기 아쉽다. 런던 지하철과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세르주 블로크의 작품이 걸렸다.
그리고 그 모든 작품들을 한국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가장 단순한 선으로 포착하는 예술가"라는 찬사를 받는 세르주 블로크의 한국 첫 개인전이 뉴스뮤지엄 연희에서 개최된다.
세르주 블로크가 협업한 제품들이 이곳에 있다. 그에게 그림은 예술이지만 비즈니스이기도 하다. 팬티, 우표, 토마토 등을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리곤 하는 것이다. 벨트나 전구는 팔아야 하는 상품인 동시에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위의 시계였다.
편지에 동봉된 지극히 평범한 손목시계. 컬러마저 별다를 것 없는 블랙이다. 커피를 마시는 과장님의 손목에서 볼 수 있는 무난한 시계는 단순한 끄적임을 통해 특별해진다.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이지만 얼굴만큼은 해맑은 시계 인간은 우리의 웃음을 자아낸다. 편지와 함께 온 것은 시계뿐만이 아니었다. 웃음이었다.
세르주 블로크는 단순한 매개를 정한 뒤 그 속에 많은 것을 담아내곤 한다. 그 덕분에 꽁꽁 묶인 선물 상자 같은 작품들이 많다. 2005년에 제작된 「나는 기다립니다(Moi J'attends)」가 그랬다.
이탈리아 작가 다비드 칼리(Davide Cali)가 서투른 불어로 집필한 초안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실'을 이용하여 표현되었다. 직조는 수렵과 농경 문화권에서 인류가 오래전부터 행한 중요한 활동이다. 21세기의 세르주 블로크 역시 빨간색 털실을 선택했다. 불필요한 색채 사용과 장식 요소는 철저히 배제됐다.
2023년의 「나는 기다립니다(Moi J'attends)」는 애니메이션으로 재해석되었다.
실은 어린아이의 빨간색 니트로 시작된다. 니트는 곧 크리스마스의 장식으로 이어지고, 연인 사이의 붉은 인연으로 연결된다. 어린 자녀들의 썰매를 끌기도 한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남자는 노쇠하여 병실에 눕는다. 붉은 선은 지팡이로 변해있다.
선은 오래된 치료제와 같습니다. 매일 복용하면서 20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세르주 블로크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일생을 함께해 온 '선'을 통해 한 남자의 움트고 지는 일생을 표현해냈다. 빨간 털실은 곧게 뻗어나가다가도 동그랗게 휘어진다. 때로는 털옷이 되고, 때로는 지팡이가 된다.
구불거리는 빨간 털실을 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길이는 조절할 수 없지만 모양은 마음껏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인생 선이 아닐까. 한껏 꾸며낸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시 풀어내고 새로운 모양을 만들면 되니까.
그렇게 세르주 블로크의 인생이 담긴 흔적들을 따라가다 보면 발치에 계단이 닿는다. 머리를 조심하라는 안내를 듣고 따라 올라가면 사랑이 가득 담긴 공간이 나타난다.
오랫동안, 파리의 센 강에서
너에게 입맞추는 꿈을 꿨어.
평생 멋진 키스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
이 세상에는 너와 키스하고 싶은 곳들이 수도 없이 많아.
베니스, 도쿄, 비엔나, ..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생각해?
「너에게 키스하고 싶어」 중에서
베니스, 도쿄, 비엔나, 뉴욕, 상하이, 바르셀로나, 레이키아빅, 런던에서의 키스를 말하던 작가가 결국 '서울'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는 날과 잘 어울리는 시도 함께였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은 'KISS'다. 그러니 다락방이야말로 핵심적인 공간이었다. 모든 도시의 입맞춤을 모아놓은 것만 같은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낙서 같기도, 만화 같기도 한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종이에 묻어났던 작가의 웃음이 작은 공간에 번지는 것만 같았다. 시향지같은 작품들이었다. 한적한 시간대 한참 동안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장소였다.
어쩌면 세르주 블로크는 세상에 입을 맞추고 싶었던 것 아닐까. 사랑이 가득 담긴 작가의 입맞춤이 바다를 건너 서울까지 와 닿았다. 그의 전 인류적인 사랑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즐거운 전시였다.
그러니 몸에 한기가 드는 겨울, 세르주 블로크의 다락방을 찾아보자.
입술 자국이 마구 찍힌 엽서가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에서 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