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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Mar 21. 2024

봄, 따뜻한 바람 속에서

밤이도다 봄이다

해마다 3월 중순이 넘어가고 벚꽃필 무렵이 되면 누구에도 말하지 못한 열병을 앓는다. 지금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끝은 간질간질. 상대도 없는 설렘이 무의식 저편에서 밀려와 가슴 가득 퍼져 나가고, 이 짧은 환희의 끝에는 어김없이 사랑하는 이와 막 이별한 것 같은 가슴 쓰라린 상실의 감각이 나를 스쳐 지난다.


매년 겪는 일이라 그저 앓고 지나가면 그만인 열병이지만 이 선명하고 강렬한 감각으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언젠가부터 되려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고마워 이 생경한 감정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올해 나는 마흔이 되었다. ‘마흔이 넘어도 여전히 봄의 열병을 느낄 수 있을까?’ 유난히 바빴던 3월, 일상의 사소함과 유난했던 업무 사이에서 문득 겁이 나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어떤 감각이 영영 떠나 버린 것만 같았다. 봄의 열병마저도 세월이라는 도둑에게 빼앗기는 것일까? 서러움이 설렘을 대신하여, 봄을 알리는 갖가지 꽃을 바라보는 시선 끝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오늘, 조금 늦은 퇴근길 어깨를 스치는 따뜻한 바람결에 드디어 그가 내게 찾아왔다. 일 년 간의 기다림 끝에 잃었다 생각했던 감정을 다시 만난다. 가만히 눈을 감고 봄의 손길을 느낀다.


- 올해도 와 주셔서 감사해요. 줄곧 기다렸어요.

  이 봄 나를 다시 한번 설레게 해 주는 당신이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요.

  나는 당신을 어떠한 선명한 감각으로 기억해요.

  떠난 줄도 모르고 잃었던 젊음처럼

  어느 순간 내 곁을 떠나겠지만

  그날까지 이 설렘과 상실감을 기다리고만 싶어요.

  그때까지 영영 지금처럼 어여쁘셔요.


봄을 탄다고들 한다. 그것은 때로 부정적인 감각으로 그려지지만 요즈음의 나는 자꾸만 봄을 앓고만 싶어 진다. 할 수만 있다면 아끼고 늘여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봄마다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영원히 젊음의 한 자락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다.


온몸 가득 차올라있던 젊음이 이 몸을 떠날 때 자기도 모르게 때를 놓친 젊음의 한 조각이 운 좋게 가슴속 깊숙한 곳에 살아남아 해마다 봄이면 그 존재를 드러내어 스무 살의 나를 다시 한번  살아내는 것. 그것이 ‘봄을 타는’ 이들이 가진 작은 행운의 정체는 아닐까?


못내 아쉬운 봄날의 사랑과 이별의 대상이 젊은 날의 나인지 아니면 스치는 봄바람일지 이 밤 긴 상념에 빠진다.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중략)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 봄은 간다.(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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