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사랑하는 이유
여름을 좋아한다. 낮이 길어 긴 하루를 보내는 것, 해변가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 흥성한 거리를 걷는 것, 휴가철의 달콤한 휴식처럼 달큰한 공기, 방학을 맞은 아이들의 나른하게 흐르는 시간, 춤추는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땀방울, 로맨스를 꿈꾸며 오가는 젊은 눈빛들을 바라보는 시간들. 굳이 물놀이와 모래성을 언급하지 않아도 여름이기에 가능한 이 모든 일들을 누리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오래된 취미가 있다.
남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소비생활인데 나는 어디서든 여름에 대한 책만 보면 지갑을 열고 만다. 이렇게 사들인 책들이 어느새 하나의 컬렉션이 되어 여름이면 인테리어 용도로 쓰일 만큼이나 모였다. 실상은 내용은 차지하고 여름을 상징하는 파랑, 초록 싱그러운 표지에 마음을 뺏겨 사들인 책들이다. 카뮈의 ‘결혼, 여름’은 표지의 색감이 너무 아름다워 가지고 있던 판본을 처분하고 새로 사들였고,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세밀한 묘사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짙은 숲이 그려진 표지에 마음을 뺐겨 여름마다 펼쳐 들곤 한다. 낮이 긴 만큼 여유로운 여름날, 청초한 여름의 책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한 줄기 바람을 불러온다.
여름의 음료들은 유혹적이다.
이제는 사계절을 막론하고 사랑받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시작해서 수박과 망고 등의 여름 과일을 얼려 만든 스무디, 주먹만 한 얼음이 한 잔 가득 들어찬 탄산음료까지 알록달록 예쁜 색깔로 식욕을 자극한다. 투명한 얼음과 유리잔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은 보기만 해도 아름다워 시각적으로도 완벽한 음식이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하루에도 몇 잔씩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먹던 나날들과는 이별을 고했지만 최근 들어 유행하는 각종 콤부차는 커피를 못 마시는 섭섭한 마음을 꽉 채워주는 완벽한 휴식이 되었다.
유리 식기는 여름과 잘 어울리는 부엌의 풍경이다.
어느 작가의 어머니는 유리 식기와 도자기 식기를 계절마다 번갈아 사용하며 계절을 주방에 들이셨다고 한다. 비싸지 않은 유리컵과 유리 접시 몇 개로 한층 더 우아해지는 여름의 식탁을 위해 6월이 되면 그릇을 쇼핑한다. 어차피 한 계절이 물러가면 여기저기 깨어지고 말 것을 알기에 비싼 그릇을 구입하지 않는다.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소담해서 마음에 드는 무인양품의 유리 그릇과 유려한 곡선이 아름다운 이케아의 유리잔, 시즌별로 다채로운 감각을 더하는 모던하우스의 식기들을 취향에 맞게 구입해 사용하면 요리하기 싫은 여름에도 가끔은 정성 들여 예쁜 그릇에 담긴 식사를 차려내는 소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때로 물기를 가득 머금은 불쾌한 공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몸과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날에는 비치보이즈스의 노래를 틀어두고 까슬까슬한 여름 이불을 펴 둔 바닥으로 몸을 누인다. 몸의 움직임도 머릿속 무심히 흘러가는 생각들도 모두 멈추면 불쾌한 피로감도 뜨거운 태양 아래 숨을 고른다. 아무리 습한 여름이라도 ‘Kokomo’의 나른한 리듬과 머리를 댈 바닥만 있으면 그 또한 버틸만한 낭만이 된다.
도서관과 미술관을 방문하기에 여름보다 더 좋은 계절이 있을까?
한 발짝만 들어서면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에 태양볕 아래 시름하던 몸의 털이 바싹 곤두서는 공간. 창밖에는 초록의 물결이 넘실대고 시원한 공기의 실내에서는 좋아하는 것들이 한가득인 공간. 죄책감 없이 에어컨의 냉기를 마음껏 누리고 두 손 가득 책이나 예쁜 브로셔를 안고 노을이 질 무렵 터벅터벅 걸어 나오면 바깥은 메미소리로 가득 차있디. 최근에 지어진 도서관이나 미술관은 아름답기까지 해서 그 공간을 누리는 것이 호사라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여름날의 초저녁, 산책하듯 아름다운 공간을 돌아 나오며 나도 모르게 좋아하는 것들로 꽉 찬 이 계절을 사랑하게 된다.
여름밤 열대야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조심스레 집을 빠져나와 조용한 놀이터로 향한다.
낮의 열기로 적당히 덥혀진 공간, 아이들이 먹다 남긴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향기 사이로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네에 앉는다. 마흔의 나이에도 그네에 앉으면 마음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몸은 그네의 리듬에 정확하게 반응한다. 어떻게 해야 높이 오를 수 있는지, 얼마나 반동을 주어야 떨어지지 않고 바람을 최대한으로 느낄 수 있는지 몸은 기억하고 있다. 자연스레 반응하는 몸의 리듬에 모든 것을 맡기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아찔하게 스치는 바람을 느낀다. 몸으로 만들어낸 바람의 흐름과 머리 위로 무심히 흐르는 검은 구름, 살짝 얼굴을 내미는 달까지 음미하면 여름밤의 선물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나에게 여름은 차가운 면의 계절이다.
콩국수와 냉면이 시즌 메뉴로 자리 잡고, 막국수와 메밀 소바, 매콤한 비빔 국수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 평소에도 면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나는 이 계절만큼은 죄책감 없이 마음껏 차가운 면요리를 즐긴다. 뜨거운 불 앞에서 요리하는 것이 싫지만 기파르게 오른 물가에 외식을 주장하기도 힘든 날에는 재래시장으로 간다. 시장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칼국수 가게에서 사 천 원짜리 비빔 칼국수를 시켜 먹고 콩나물 천 원어치를 구입해 달랑달랑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여름날의 오래된 즐거움이다.
치덕치덕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힘든 여름날이 이어진다. 여름을 좋아하는 나도 이토록 살인적인 더위와 습기에는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힘이 빠지곤 한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불러온
이 재앙 같은 여름에도
우리는 우리의 날들을 살아내야만 하기에
이 계절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누릴 궁리를 이어간다.
여름을 즐기는 자신의 방식을 마련해 계절을 만끽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여름응 손을 흔들고 멀어지겠지.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집 안으로만 숨어드는 계절이 오기 전에 나는 그와 열렬히 사랑하고 끝까지 즐거우려 한다. 절망적인 지구의 상황에는 슬픔과 후회가 가득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하는 지구의 시간에도 우리의 하루하루는 작은 행복으로 아름다워야만 한다. 짜증과 피로감에 잠식당하지 않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에서도 행복의 실마리를 찾아 저마다의 여름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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