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2023 아르코 창작기금 선정작
경자는 요즘 미싱사를 그만두던 날의 꿈을 자주 꿨다. 그날도 변함없이 아침엔 라디오로 김기덕의 골든디스크를, 오후엔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를 들으며 와이셔츠의 카라를 박았다. 지하에 있는 공장은 계단을 내려 들어서는 순간 외부 세계와 완벽히 차단되었다. 날씨도 시간의 변화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미싱에 앉아 정해진 양을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손과 발을 놀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마친 후 동료들과 한 번씩 손을 잡았다. 아이엠에프 때도 두 사람 몫을 해낸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던 경자였다. 그 대가로 경자는 서른살 즈음에 오십견을 얻었다. 오래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언니가 없으면 우리 어떡해. 나중에 아들 결혼식 하면 꼭 불러, 하고 훌쩍거렸다. 경자는 밝은 얼굴로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왔다. 여름이라 아직 해가 길었다. 경자는 사장이 조금 더 얹어준 돈으로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인절미와 남편이 좋아하는 돼지고기 두루치기 거리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 늘 하던 대로 밥을 안치고 국을 끓였다. 시어머니의 입으로 잘게 자른 떡을 조금씩 넣어주고 물김치 국물을 떠먹였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부드러운 것은 삼키고 딱딱한 것은 씹어 넘겼다. 세수하고 콜드크림을 바르고 어머니의 발치에 누웠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끝이 났고 다음 날 경자는 갈 곳을 잃었다. 요즘 눈을 뜨면 경자는 지금 미싱사가 아닌 것이 슬퍼서 눈물이 났다.
시골에 혼자 살던 시어머니가 반신불수가 되고 나자 경자의 몫이 되었다. 누구도 경자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어머니를 데려왔다. 시어머니는 경자가 없으면 밥을 먹지도 않고 기저귀 갈기도 거부했다. 자신의 아들은 남자라서 싫다고 했다. 오직 경자만이 시어머니를 돌볼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능숙한 조련사였다. 싫고 좋다를 때로는 반대로, 때로는 맞게 쓰며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다. 시어머니는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을 원했다. 모든 일을 원하는 대로 해주어도 무섭게 화를 냈다. 진심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경자는 그렇게 7년을 병든 노인의 똥오줌을 받아내고 삼시 세끼를 바로 한 밥으로 지어 바치고도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을 들었다. 남편은 어머니의 기분에 따라 경자의 하루를 평가했다. 경자는 비 오는 날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지자 비로소 시어머니에게서 해방되었다.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를 하루도 감당할 수 없었고 시동생들은 나몰라라했다. 어머니는 지방의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어머니는 병원으로 떠나기 전날 밤 목을 매려고 넥타이를 매듭지었다. 경자는 그것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알았고 재빨리 넥타이를 뺏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자주 경자의 꿈에 나왔다. 그녀는 꿈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경자에게 복수했다. 경자를 억지로 밥상에 앉혀놓고 알록달록하고 번들번들한 옥춘사탕이나 식어 굳은 떡을 먹으라고 자꾸 권했다. 어떤 날의 꿈에 시어머니는 냇가에 앉아서 무언가를 계속 씻고 있었다. 뭐 하세요? 가서 묻는 경자에게 시어머니는 말갛게 씻은 돌을 치마폭에 쏟아주었다. 들큼한 목소리로 경자의 귓가에 너만 주는 거야. 하면서 계속해서 돌을 쏟았다. 경자는 무거워진 치마폭을 견디지 못해 물속으로 주저앉았고 그대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시어머니가 요양원 생활 삼 년 만에 죽자, 남편이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남편은 모든 치료를 거부한 채 집에서 죽겠다고 선언했다. 병원에서는 6개월을 선고했지만, 남편은 그렇게 삼 년을 더 살았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채로. 모든 악다구니와 생떼는 곧 죽을 사람이라는 사실에 가려졌다. 남편은 자신이 불쌍하다고 자주 울었다. 그러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밥상을 엎었다.
세월이 흐르자 남편은 부처의 얼굴을 닮아갔다. 귓불은 아래로 축 늘어졌고 체모가 사라진 다갈색 피부는 부드러웠다. 이빨이 다 빠져 쭈글쭈글해진 입으로 말없이 웃기만 했다.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배경음으로 틀어놓고 침대에 누워 손만 까딱거리는 것으로 모든 욕구를 충족시켰다. 어쩜 그 댁 아저씨는 그렇게 점잖으세요? 거듭되었던 입원 생활 동안 병실의 모든 사람은 남편의 인품을 칭찬했다. 남편은 부드러운 웃음을 띠는 것만으로 경자에게 모든 감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밤에는 가래 끓는 기침을 오래오래 했다. 처음에 경자는 남편의 기침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안절부절못했지만 나중엔 눈을 꼭 감고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영생을 누릴 것 같던 남편이 죽고 난 뒤 경자는 후련했다. 이제 자신을 괴롭히는 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경자는 누구에게도 신세 지지 않으며 즐겁게 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경자에게 몇십 년간 미뤄두었던 후회가 닥쳐왔다. 후회는 그림자처럼 경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했다.
경자는 손으로 피곤한 눈을 꾹꾹 눌렀다.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회색의 성근 머리카락 아래 흐리멍덩한 눈과 굳은 입매의 늙은 여자가 있다. 고개의 각도에 따라 처연해 보이기도 혹은 완고해 보이기도 하는 인상이다. 경자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한참을 그 여자와 마주했다. 손자국으로 부옇게 된 창문은 어느 순간에 젊은 시절의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다. 경자는 그 순간을 찾아 하염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