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2023년 아르코 창작기금 선정작
경자는 아파트 앞 새로 생긴 설렁탕집에 들어서서 쭈뼛거렸다. 카운터에 있는 주인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입술만 웃으며 경자를 바라보았다. 경자는 주섬주섬 냉장고 손잡이가 든 비닐 봉투를 끌렀다.
이거 두고 손님들 하나씩 주세요. 내가 만든 거예요.
가게 주인은 차가운 눈으로 경자를 훑었다.
안 사요. 잡상인 출입 금지예요.
경자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그냥 드리는 거예요.
안 사요.
경자는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내가.. 오늘 아침에 내가 죽을 뻔했는데... 목구멍에서 하지 못한 말이 뱅글뱅글 작은 덩어리로 돌았다. 왜 사람들이 냉장고 손잡이를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들이 오면 김치찌개를 끓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앞에 선 장터에서 두부를 한모 사들었다. 청양고추도, 대파도, 흙이 묻어 싱싱해 보이는 당근도. 장터에는 아는 얼굴이 많았다. 경자는 어떤 날엔 인사를 하고 어떤 날엔 모른척했다. 어떤 날은 상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고 어떤 날은 그런 건 왜 물어요? 하는 자세로 옷깃을 여몄다.
뭐 이것저것 많이 사셨네?
숨을 돌리려 벤치에 앉은 경자에게 누군가 물었다. 오다가다 마주쳐 얼굴만 아는 할머니였다. 경자는 할머니들이 자신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 때마다 속으로 놀라곤 했다. 자신이 그들과 비슷한 또래가 되었다는 것과, 그들이 자신을 비슷한 또래로 본다는 사실 두 가지가 모두 놀라웠다.
여자는 치자꽃 화분을 들고 있었다. 활짝 핀 꽃 한 송이와 여물어가는 봉오리가 탐스러웠다. 경자는 괜히 반가웠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이 여자는 가드니아를 알까?
이거 무슨 꽃인지 알아요?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치자잖아요.
이거 가드니아예요. 가드니아.
경자는 우쭐해졌다. 여자는 갸우뚱하다 상관없다는 듯 경자의 머리를 쳐다봤다.
모자 어디서 사셨어? 나도 그런 거 사고 싶은데.
경자는 모자의 챙을 만졌다. 예전에 만든 것이었다. 꽃무늬 마직을 잘라 박은 다음 챙에 심을 넣고 옆으로 수를 놓았다. 기분이 좋았다.
집에 모자가 없는 건 아닌데 애들이 잔뜩 사다 줬거든. 미국에서 사다 준 것도 있고. 그런데 마음에 드는 건 막상 없으니까. 그런데 그건 딱 좋아 보이네. 챙이 넓지도 안하고. 색도 조신하고. 챙이 넓으면 그림자가 져서 또 안 보이고. 색이 마음에 들면 챙이 마음에 안 들고 챙이 마음에 들면 무늬가 마음에 안 들어.
여자는 경자가 답을 하거나 말거나 계속 자신의 말을 이었다.
요즘 뭐 해 먹어야 해요? 입맛이 통 없어. 그냥 누가 해주는 밥 먹고 싶은데. 참 이년의 팔자.
여자는 흐흐흐 웃었다. 경자도 같이 웃었다.
그냥 밥에 물 말아 김치 먹어요. 불 때는 것도 귀찮은데, 아들이 온대서 두부 샀어요. 그래도 찌개를 끓여줘야 먹은 거 같으니까.
우리 애들도 엄마한테 힘든데 사 잡수라고 사 잡수라고 해. 그런데 또 그게 되나. 사람은 늙으나 사나 그래도 움직여야 하거든.
여자는 한참 동안을 자신의 살림 규모와 자식들의 직업에 관해 이야기했다.
경자는 나 오늘 죽을 뻔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여자가 말을 끊기만을 기다렸다. 여자의 말은 들리지 않고 쉴새 없이 움직이는 입과 그 옆의 주름만 보였다. 경자는 문득 냉장고 손잡이를 생각해내곤 주섬주섬 비닐을 끌렀다.
이거 내가 만든 건데. 냉장고 손잡이예요. 골라서 가져가세요. 많이 가져가요.
냉장고 손잡이? 요새 냉장고에 손잡이가 어디 있어? 뭐하러 힘들게 이렇게 많이 만들었대?
냉장고에 손잡이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열어요?
그냥 다 열어져. 우리 집에 작년에 딸이 사준 건 누르면 그냥 탁 열려.
여자가 호호호 웃었다. 경자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었다. 집에도 잔뜩 있는 냉장고 손잡이가 짐 더미처럼 느껴졌다. 냉장고에 손잡이가 없어진 것도 모르고.
여자는 갑자기 벌떡 손을 들었다.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 화상, 뭣헐러고 이 더위에 기어 나와서. 이구 조상님아 저 화상 안 데려가고 뭐 하셔요.
여자의 말투는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다정했다.
일루와 일루와.
여자는 궁둥이를 옮기며 노인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오늘은 무슨 국을 끓여야 하나. 우리 아저씨는 삼시 세끼 국이 있어야 식사를 하셔. 아주 귀찮아죽겠어.
경자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